皇華臺
이춘구의 세상이야기

황화대 칼럼-108 정읍사 망부석의 위치 고증과 유추
 
    “달님이시여, 높이 좀 돋으시어 아아 멀리멀리 비추어 주십시오. 저자(시장)에 가 계십니까? 아아, 진흙땅을 디딜까 두렵습니다. 어느 곳에나 (마음을) 놓고 계십니까? 아아, 내 님이 가는 곳에 (날이) 저물까 두렵습니다.”
  삼국시대 백제에서 부른 가요 정읍사(井邑詞)의 가사이다. 백제의 서동요, 가야의 귀지가, 신라의 도솔가 등처럼 삼국시대를 대표하는 속요이다. 그래서 『악학궤범』에 등장한다. 망부석이 정읍사를 낳고, 정읍사는 망부석(望夫石)이 만들어낸 옛 노래이다. 망부석은 『고려사』『신증동국여지승람』에 등장한다. 이에 따라 망부석은 고적(古蹟)인 것이다. 고적은 ‘남아 있는 옛날의 유적, 발자취’라고 정의할 수 있다. 망부석은 전설이 아니라 실재하였던 역사적 사실의 무대이다.
  망부석의 위치에 대해서는 송화섭 중앙대학교 교수가 문헌과 현장조사, 주민 면담 등을 통해 명백히 규명했다. 『고려사』71권 지25 악2 삼국속악 백제 관련 기록을 살펴보자. 정읍은 전주의 속현으로 현인이 행상을 나간 뒤에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으니, 그의 처가 산 바위에 올라 바라보며, 남편이 밤길에 해로움을 당하고 진흙탕 물에 의탁할까 두려워하여 노래를 지었다. 세상에 전하기를 고갯마루에 올라가면 망부석이 있다고 하였다.
  송화섭 교수는 당시 정읍은 전주의 속현이 아니라고 설명한다. 여기서 현인은 정촌현 사람이며, 상인으로 풀이한다. 정읍사의 핵심은 남편이 밤길에 산적 등의 위협으로 상해를 당하지 않을까, 진흙탕 벌에 넘어져 옷이 더렵혀지지 않을까 걱정하면서 노래를 지은 것이라는 점이다. 망부석의 세전에 대해서는 앞 절의 산 바위에 오른 것과 고갯마루에 올라가면 망부석이 있다는 말이 일치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다음에는 『신증동국여지승람』 정읍현 고적 망부석 기록과 비교한다. 망부석은 현의 북쪽 10리에 있다고 하였다. 그 다음 현인이 행상을 나가고 돌아오지 않자 그 처가 산 고개에 올라 가요를 지었다는 내용과 세전 기록은 『고려사』와 동일하다, 송화섭 교수는 북쪽 10리 지점을 확인하는데 집중했다. 1872년에 편찬된 정읍현 지도에 북쪽으로 8리쯤 되는 곳이 농소동이며 이 일대는 두승산 권이다. 여기서 2리, 즉 840미터 쯤 떨어진 곳에 망부석이 위치하는 것으로 상정한다.
  결국 망부석은 농소동 샘실마을 인근에서 찾아야 한다. 이 같은 결론은 마을 주민 송하영 씨의 진술에 의해서도 확인된다. 현장에서 보면 치마바위산(동죽산) 동죽재에 오르면 부엉바위로 불리는 큰 바위가 있다. 이 부엉바위가 세전하는 고갯마루에 있는 망부석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현장답사에서 망부석에 서면 바로 눈앞에 고부장이 보이고, 행상 나간 현인이 오고 갔을 법한 산길이 녹음 속에 자취를 감추고 있다. 결정적인 것은 정읍현 지도에 표시된 ‘두승산 망부석’ 기록이다. 송화섭 교수는 정읍 사학자 곽형주 선생의 도움으로 지도를 확인하게 됐다고 한다.
  송화섭 교수의 망부석 위치 연구는 우리에게 많은 점을 시사하고 있다. 우선 문헌과 현장답사, 면담 등을 통한 과학적 역사 연구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둘째 정읍사 내용에 대한 사실적 분석이다. 문헌적 해석과 실증적 분석에 따라 담담하게 고부장을 유추하고, 현인의 행상로를 추정하고 있다. 셋째 연구 결과의 활용이다. 망부석 등점로를 따라 정읍사둘레길을 만들면 정읍시의 관광상품으로 인기를 끌 수 있을 것이다.
  치마바위산 동죽재에 오르는 길에서는 임진왜란 때 순절한 동래부사 송상현의 유적을 만날 수 있다. 천곡사지에 이르면 후백제 진훤대왕의 삼한통일의 염원이 담긴 천곡사지 7층탑을 볼 수 있다. 또한 마한의 분구묘와 백제의 횡혈식 고분군, 은선리 삼층석탑 등을 만날 수 있다. 고부천 줄기로 내려오면 백제 부흥군의 마지막 전투장면을 상상할 수 있는 고부 눌제 평야가 펼쳐진다. 한국고대사의 파노라마가 고부 두승산을 중심으로 펼쳐져 있다. 그 가운데 백제의 망부석이 자리하고 있다. 
  망부석을 찾으면서 생각나는 것은 월인천강지곡의 염원이다. 천 갈래 강줄기 마다 달빛으로 인장을 찍으며 중생구제를 염원하는 조선 창업자들의 기도이다. 또 다른 생각은 중생구제의 염원을 담은 수제천의 올바른 해석이다. 수제천은 일제강점기 때 정읍 악곡에 잘못 붙여진 이름이라는 해석을 두고 반성을 과제로 안겨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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