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희(예원예술대학교 교수, 前 전주역사박물관장)정경세는 경상도 상주 출신으로 서애 유성룡의 제자가 되어 퇴계 이황의 학통을 이었다. 1611년(광해 3) 2월에 전라감사로 도임하여 7개월간 재임하였으며, 인조반정 후 홍문관 부제학으로 복직하여 이조판서와 예문관 대제학에 올랐다. 남인의 우두머리이면서 서인인 송준길을 사위로 삼았다. ▶경상도 상주 출신의 진주 정씨정경세(鄭經世, 1563∼1633)의 본관은 진주, 자는 경임(景任), 호는 우복(愚伏)이다. 아버지는 정여관(鄭汝寬)이고, 어머니는 합천이씨(陜川李氏) 이공가(李公軻)의
이 동 희 (예원예술대학교 교수, 前 전주역사박물관장)박승종(朴承宗)과 그 아들 박자흥(朴自興)은 부자간에 전라감사를 지냈다. 대대로 문과자를 배출한 명문의 후예로 당색은 북인(소북)이다. 박승종은 아들 박자흥의 딸이 광해군의 세자빈이 되면서 권력의 정점에 올라 광해군이 폐위될 때까지 5년간 영의정에 있었다.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박승종은 장남 박자흥과 함께 자결하였으며, 차남 박자응(朴自凝)에게 편지를 보내, ‘너는 죽지 말고 선조(先祖)의 제사를 받들라.’고 유언하였다. ▶대대로 문과자를 배출한, 광해군대 세자빈의 본가박승종 집안
/이 동 희 (예원예술대학교 교수, 前 전주역사박물관장)권협은 임진왜란 때 서울 사수를 강하게 주장하였으며, 정유재란 때 고급사(告急使)로 명나라에 가서 원병을 끌어내 선무공신에 책봉되었다. 그 손자 권대재는 전라감사로 부임하여 위봉산성을 축조하였으며, 남인의 영수로 송시열을 처형할 것을 주장하였다. 현손 권중경은 영의정 권대운의 손자로 영조 4년 조카 이인좌가 난을 일으키자 자결하였다. 권협은 선조대에, 권대재는 숙종대에, 권중경은 경종대에 전라감사 겸 전주부윤을 역임하였다. ▶권상과 다섯 아들 권수ㆍ권황ㆍ권희ㆍ권선ㆍ권협권상(權常
/이 동 희 (예원예술대학교 교수, 前 전주역사박물관장)“덕(德)은 크고 신조는 높았어라. 돌은 닳을 수 있지만 이름은 없어지지 않으리” 허성의 묘비명이다. 허성은 “허씨 오문장”의 한 사람으로 당대 뛰어난 문장가였으며 서화에도 능했다. 임진왜란 직전에 통신사 일행으로 일본에 다녀와 왜적의 침공을 예견하였으며, 1601년에 전라감사로 부임하여 이듬해 이임하였다. 허성은 선조로부터 영창대군을 부탁받은 고명대신이기도 하다. ▶허씨 5문장의 문을 연 아버지 허엽양천 허씨 허엽(許曄)과 그의 네 명의 자녀 허성(許筬)ㆍ허봉(許篈)ㆍ허난설헌
/이동희 (예원예술대학교 교수, 前 전주역사박물관장)황신은 1597년(선조 30) 8월에 정유재란이 발발하면서 전라감사로 부임하여 이듬해 12월 7년 전쟁이 끝날 때 이임하였다. 전라감사로 재임하면서 전란에 불탄 전라감영 선화당을 중건하였으며, 일본군 토벌에 주력하고, 전란이 끝나갈 때 대마도를 정벌할 것을 주장하였다. 재정에 밝아 광해군 즉위년 대동법 시행에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이며, 이후 호조판서를 6년간 역임하면서 전란 후 어려운 재정문제 처리에 공헌하였다. ▶문과 알성시에 장원 급제황신(黃愼, 1562~1617)은 본관이 창
이 동 희 (예원예술대학교 교수, 前 전주역사박물관장)이광은 두 번에 걸쳐 전라감사를 역임하였다. 그것도 중차대한 시점인 1589년(선조 22) 정여립 모역사건이 일어났을 때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전라감사였다. 임진왜란 초 전라감사로 근왕병을 이끌고 북상하다가 용인에서 대패하여 비난을 받았지만 웅치전과 전주성 수호의 최고 책임자로 전라도를 보존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는 전라도와 인연이 깊은데, 외가가 전라도 고부이며 말년에 이곳에 내려와 살았다. ▶ 덕수이씨 좌의정 이행의 손자전라감사 이광(李洸, 1541∼1607
▶대사헌을 사직하고 창평으로 낙향정철(鄭澈)은 전라감사를 역임하고 1582년 도승지에 임용되어 서울로 올라갔다. 도승지는 국왕의 비서기구인 승정원의 수장으로 지금의 청와대 비서실장 같은 자리인데, 정철은 대간의 탄핵을 받아 도승지직을 사직하고 나가지 않았다. 당시 사헌부에서, “도승지 정철은 술주정이 심하고 광망(狂妄)하니 체직시키소서”라고 탄핵하였다. 정철은 몇 달후 함경도관찰사에 임용되었다.1583년 정철의 나이 48세 때 예조판서에 특별히 제수되었다. 이번에도 사헌부에서 술주정을 문제 삼아 임용을 반대하였다. 정철에 대한 논박
정철은 가사문학의 거성으로 문학사적으로 그 위상이 매우 높다. 그런가 하면 정치적으로는 정여립 사건 때 많은 동인들을 죽음으로 내몬 주역으로 평해진다. 그는 서울에서 창평(담양)으로 이주하여 살았다. 1581년에 전라도관찰사로 부임하였으며, 1589년 정여립 사건이 일어나자 우의정에 올라 위관으로서 추국을 관장하였다. 이듬해 좌의정에 올라 선조에게 후계자를 세울 것을 요청하다가 유배되었다. ▶서울 명문가로 을사사화 때 몰락정철(鄭澈, 1536∼1593)의 본관은 연일(延日), 자는 계함(季涵), 호는 송강(松江)이다. 아버지는 돈녕
김계휘는 충청도 3대 명문 연산의 광산김씨로 사계 김장생의 아버지이다. 선조 11년(1578)에 전라감사로 부임하여 이듬해 형조참판이 되어 교체되었다. 연산의 광산김씨는 김장생과 김집, 부자지간에 문묘에 배향된 유일한 집안이다. 김계휘의 후예들에서 김문현 등 여러 명의 전라감사가 나왔다. ▶충청도 3대 명문 연산의 광산김씨, 회덕의 은진송씨, 이성의 파평윤씨‘충청도 양반’이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충청도는 양반 이미지가 강하다. 이는 조선 후기에 충청도 출신 호서사림들이 정국의 주도적 위치에 있었던 것과 관련되어 있다. 조선후기 중
심의겸은 명종비 인순왕후의 동생으로 선조 8년(1575) 동서분당의 주역이다. 대사헌과 개성유수를 지내고 선조 10년(1577)에 전라감사로 부임하였으며, 선조 15년에는 전주부윤을 역임하였다. 동인이 득세하면서 파직되어 파주로 낙향해 살다가 53세에 졸하였다.▶명종비 인순왕후의 동생심의겸(沈義謙)은 청송심씨로 1535년(중종 30)에 태어나서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5년 전인 1587년(선조 20) 53세로 졸하였다. 그의 자(字)는 방숙(方叔), 호는 손암(巽菴)ㆍ간암(艮菴)ㆍ황재(黃齋)이다. 그의 6대조가 세종의 국구(장인)로 영
이중호는 전라도 남평(나주) 출신으로, 정여립 모반사건 때 희생된 동인 이발과 이길 형제의 아버지이다. 그의 집안 광주(광산) 이씨 가문은 문과급제자를 10대에 걸쳐 연이어 배출하여 십대홍문(十代紅門)이라고 불린 명문이었으나 정여립 사건에 연루되어 멸문지화를 당하였다. 이중호는 동부승지를 역임하고 선조 6년 7월에 전라감사로 부임하여 3개월만인 10월에 이임하였다. ▶십대홍문(十代紅門) 광주(광산) 이씨 이중호(李仲虎, 1516~?)는 본관이 광주(광산)이며 남평(나주) 출신이다. 남평현은 1914년 일제강점기에 나주에 통합되었으며
미암 유희춘은 전라도 해남 출신의 대학자로 방대한 분량의 자필 일기 『미암일기』를 남겼다. 이 일기는 미암이 1567년(선조 즉위년) 10월부터 1577년(선조 10) 5월까지 10년간에 걸쳐 쓴 것이다. 여기에 1571년(선조 4) 2월 전라감사에 임용되어 그해 10월 이임할 때까지의 일지가 들어 있다. 지난번에는 유희춘에 대해 알아보았고, 이번에는 『미암일기』에 실린 전라감사에 대해 살펴본다.▶ 『미암일기』 개관『미암일기』(11책, 보물)는 조선시대 개인 일기로 가장 방대한 분량이라고 알려져 있다. 본래 14책이었는데 현재는 1
미암 유희춘은 성리학의 대가로 해남에 살다가 처향 창평(담양)으로 옮겨 살았다. 명종 2년에 문정왕후를 비난하는 양재역 벽서 사건으로 20여 년간 유배되었다가 복직되어 선조 4년(1571)에 전라감사로 부임하였다. 10년간에 걸쳐 쓴 자필 일기 『미암일기』로 유명한데, 이 일기는 『선조실록』 편찬의 기본 자료로 쓰였으며, 조선시대 사대부의 일상생활과 감영제도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전라도 해남 출신, 처향 담양으로 이주유희춘(柳希春)은 중종 8년(1513) 전라도 해남현 해리 외가에서 태어났으며, 선조 10년(1577)
권철과 권율은 조선초의 대학자 권근의 후예로 부자간에 전라감사를 지냈다. 권철은 명종 11년(1556)에, 권율은 선조 25년(1592)에 전라감사를 역임하였다. 이후 권철은 영의정을 네 번이나 역임하고 복상(福相)이라고 칭송되었으며, 권율은 임진왜란 때 도원수로 큰 공을 세우고 선무공신 1등에 책봉되었다. 오성 이항복이 권율의 사위이다.▶권근의 후예 권철과 권율 부자권철(權轍)과 권율(權慄) 부자는 안동권씨로 조선초 대학자 예문관대제학 권근의 후손이다. 권철의 5대조가 권근이고, 고조부가 의정부 찬성에 오른 권제이다. 증조부는 연
김만균과 아버지 김천령, 아들 김경원 3대가 모두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조선시대 문과는 지극히 어려웠던 시험으로 3대가 연이어 문과에 장원급제한다는 것은 생각하기도 어려운 일이다. 김만균은 중종대에 장원으로 문과에 급제하고 명종 원년(1546)에 전라감사를 역임하였다. 그의 다른 아들 김명원도 선조 16년(1583)에 전라감사를 역임하고 좌의정에 올랐다.▶급제자 한 명 내기도 어려웠던 문과시험조선시대 과거시험은 인재 등용책이자 고도의 통치술이다. 인재를 뽑는 것이 과거시험이지만, 조선정부는 사대부들을 위무하고 그들을 끌어안는
이 동 희 (예원예술대학교 교수, 前 전주역사박물관장) 김만균과 아버지 김천령, 아들 김경원 3대가 모두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조선시대 문과는 지극히 어려웠던 시험으로 3대가 연이어 문과에 장원급제한다는 것은 생각하기도 어려운 일이다. 김만균은 중종대에 장원으로 문과에 급제하고 명종 원년(1546)에 전라감사를 역임하였다. 그의 다른 아들 김명원도 선조 16년(1583)에 전라감사를 역임하고 좌의정에 올랐다. ▶급제자 한 명 내기도 어려웠던 문과시험조선시대 과거시험은 인재 등용책이자 고도의 통치술이다. 인재를 뽑는 것이 과거
이동희 (예원예술대학교 교수, 前 전주역사박물관장)송인수는 전주 화산서원에 이언적과 함께 배향된 성리학자이다. 기호사림의 핵심 인물로 사림의 시대를 열어가는데 지대하게 공헌하였으며, 중종 38년(1543) 45세에 전라감사로 부임하여 이듬해까지 1년 넘게 재임하였다. 은진송씨로 우암 송시열의 종증조부가 된다.▶은진송씨, 송시열의 종증조부송인수(宋麟壽, 1499~1547)는 충청도 회덕에 세거한 은진송씨이다. 그는 한양 반송방 유점동(鍮店洞, 현 서울 서대문구) 자택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송세량(宋世良)은 회덕 태생이다.송인수의 자(
송인수는 전주 화산서원에 이언적과 함께 배향된 성리학자이다. 기호사림의 핵심 인물로 사림의 시대를 열어가는데 지대하게 공헌하였으며, 중종 38년(1543) 45세에 전라감사로 부임하여 이듬해까지 1년 넘게 재임하였다. 은진송씨로 우암 송시열의 종증조부가 된다.▶은진송씨, 송시열의 종증조부송인수(宋麟壽, 1499~1547)는 충청도 회덕에 세거한 은진송씨이다. 그는 한양 반송방 유점동(鍮店洞, 현 서울 서대문구) 자택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송세량(宋世良)은 회덕 태생이다.송인수의 자(字)는 미수(眉?)ㆍ태수(台?), 호는 규암(圭菴)
송순은 전라도 담양 출신으로 가사 문학의 대가이며 면앙정의 주인이다. 그는 중종 37년(1542) 5월에 전라감사에 임용되어 이듬해 2월 이임하였다. 이후 명종 13년(1558)에는 전주부윤도 역임하였다. 그는 장수하여 과거시험에 급제한지 60주년에 나라에서 열어주는 회방연(回榜宴)의 영예를 안았다. ▶전라도 담양 출신송순(宋純, 1493~1582)의 본관은 신평(지금의 충청도 당진)이며, 자(字)는 수초(遂初)ㆍ성지(誠之), 호는 면앙정(?仰亭)ㆍ기촌(企村)이다. 담양 출신으로 아버지 송태(宋泰)와 어머니 순창 조씨 사이에서 3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