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일 시공식을 가진 법원의 ‘가인연수관’은 대한민국 초대, 2대 대법원장이었던 가인(街人) 김병로 선생(사진)의 호를 따 그의 고향에 지어지게 됐다.

가인은 지난 1887년(고종 24년) 순창군 복흥면 답동리에서 태어났다. 1905년 순창에 찾아온 최익현의 열변에 감화 이듬해 70여명의 의병과 함께 순창읍 일본인 관청을 습격했다. 당시나이는 불과 약관 20세.

이후 1910년부터 14년까지 도일, 메이지대학과 주오대학 등에서 법학을 공부하며 법조인으로서의 기틀을 다지고 1919년 경성지방법원 소속 변호사로 개업했다.

선생의 호는 평범한 사람을 뜻하는 가인이지만 그의의 일생은 전혀 평범하지 않았다.

변호사 시절 도산 안창호 선생 등을 비롯, 독립투사들에 대한 무료 변론뿐만 아니라 그들의 가족을 돌보는데 힘을 아끼지 않았다.

가인이 주친했던 각종 독립운동 변론, 비밀스러운 독립운동연구에 대한 일제의 감시가 심해지자 그는 1932년 경기 양주로 내려가 농사를 지으며 일본식으로 성도 바꾸지 않았고 일제의 배급도 받지 않은 채 은둔생활을 했다.

광복후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여, 중앙감찰위원장이 되었고, 1946년 남조선과도정부 사법부장을 지낸 뒤 1948년 선생은 초대 대한민국 대법원장, 1953년 제2대 대법원장 등 9년여 동안 한국 사법부의 수장으로 우뚝 섰다.

그는 6.25 전쟁 때 다리가 절단됐지만 목발을 집은 채 등원하는 등 강직한 절개의 소유자였다. 57년 70세로 정년 퇴임 후 64년 간염으로 서울 자택에서 별세한 그에게 정부는 건국공로훈장 단장을 수여했고 지난 1995년에는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했다.

가인은 독립투사들에 대한 변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 것으로 유명하다.

“무료로 독립운동가를 변호하는 것은 나의 소신이고 애국적 사업이라고 본다”

가인은 또 이승만 정권당시인 1952년 부산 정치 파동 직후 대법관들에게 “폭군적인 집권자가, 마치 정당한 법에 의거한 행동인 것처럼 형식을 취해 입법기관을 강요하거나 국민의 의사에 따르는 것처럼 조작하는 수법은 민주법치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며 사법부의 독립을 강조하기도 했다./백세종기자·103bell@

저작권자 © 전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