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암 돌염전

이국적인 풍경과 관광인프라가 잘 갖춰진 섬 제주도. 인터넷을 통하면 어디서 자고, 먹고, 무엇을 볼 것인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관광지. 반면 이런 이유로 좀 더 색다른 코스를 원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을 위해 제주 토박이 글쟁이 김병심(42)시인이 나섰다. 자연 경관과 역사문화를 묶은 제주 서부 하루짜리 코스다.

1132번 도로(일주 서로)를 따라 제주시내를 벗어나면 바로 애월읍이다. 제주막걸리 공장이 왼쪽으로 보인다. ‘민족미술인협회 회장을 지낸 강요배 화가가 제일 좋아하는 막걸리’라는 미처 확인하지 못한 정보지만 그의 이름이 귀에 꽃힌다.
올해 ‘이중섭 미술상’ 수상자로 선정된 강요배 화가는 우리나라 민중미술 1세대 대표작가중 한명으로 1992년 '제주민중항쟁사건'을 주제로 첫 개인전을 열고 고향인 제주도에 정착했다. “그것을 ‘알지 못한다.’라는 것 자체가 무섭고 부끄러운 그런 사건”이라는 4·3사건 관련 연작을 완성한 화집 ‘동백꽃 지다’(1998)는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고 있다. 
하귀 삼거리에 못미쳐 오른쪽 ‘하귀 애월 해안도로’로 접어든다. ‘제주환상 자전거길’이라는 부제(?)가 붙여있을 만큼 아름다운 도로다. 도로로 내려가 바로 오른쪽 마을 길을 택하면 가문동이다. 가문동을 ‘제주도의 나폴리’라고 생각한다는 시인의 설명을 뒤로 하고 해안도로를 달리니 유명한 구엄 돌염전에 이른다.
암반지대 위에 만든 염전으로 독특한 모양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사진에 담는다. 하지만 염전 원형 복원에 치우쳐 소금을 만드는 사람들에 대한 무형적 가치를 제대로 인정해주는 않는 문화재 정책을 지적하는 지역 목소리도 있다.(한라일보)

▲ 용천수

아무리 바라봐도 지루하지 않은 해안 경치를 바라보며 조금 더 가면 고내포구다. 제주도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용천수가 ‘우주물’이라는 안내판에 소개돼 있다. 해안가 용천수가 다 그러하듯 민물 샘이지만 밀물 때가 되면 짠물이 된다. 칸을 나눠 위 칸은 깨끗한 용수로 아래 칸은 빨랫물 등으로 사용했던, 제주에서만 볼 수 있는 샘이다.
특히 고내리에는 한라산과 관련, 재미있는 말이 있다. 이곳에서는 다른 지역과 달리 한라산이 보이지 않는다. 신령스러운 한라산의 기운을 많이 받지 못해 교통사고가 다른 지역에 비해 잦다고 한다. 사실관계를 떠나 주민들이 한라산을 어떻게 생각하고 의지하는지 짐작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닐까?
이 곳에서 블로거들이 많이 찾는 ‘리치망고쥬스’ 컨테이너 판매점을 구경하고 애월항으로 달린다. 이 곳 애월(涯月)에는 유명한 문인들이 많이 산다고 한다. 바다 낭떠러지와 달의 조화 가운데 글쟁이들의 마음을 당기는 무엇인가가 있는 것 아닐까?
‘고블락 식당’. 전혀 종잡을 수 없는 식당이름이다. 역시 제주 토속어는 통역이 필요하다. 고블락은 숨바꼭질이란 뜻이란다. 너무 어렵다. 독립영화 ‘지슬’을 자막없이 볼 수 없는 것도 다 그러한 까닭이다.
제주도에 여행을 다녀왔던 지인이 한 말이 생각나 물었다. “여기 사람들은 왜 ‘미친김치(생김치도, 묵은 김치도 아닌 어중간한 상태의 김치)’를 먹나요?” “제주사람들은 우영팟(텃밭)에 항상 채소를 심어 먹기 때문에 김장을 안해서 그래요.” “김장을 안해요?” “네, 추운 겨울이 없기 때문에 김장이 필요없어요, 뭍에서는 김장김치를 담가서 다음해 봄, 여름에 먹지만 여기서는 그때그때 담가서 먹기 때문에 미친김치가 많아요.”
이름이 독특한 곽지과물해변과 한림항을 지나면 그 애머럴드 빛 바다로 유명한 협재해수욕장이다. 하지만 우리가 멈춘 곳은 협재 바로 옆 금능으뜸원 해변. 보아뱀이 코끼리를 삼킨 ‘어린왕자’ 이야기 속 한 장면을 연상시키는 비양도의 모습과 애머럴드 빛 바다가 아름답다. 월정리 해변과 또 다른 느낌이다.

▲ 건조장을 활용한 꿈차롱도서관 카페
▲ 금능 꿈차롱작은도서관 카페

하지만 금능의 매력은 바다에만 있지 않다. 금능에 오면 꼭 들려야 할 곳이 있다는 권유에 방문한 곳은 ‘금능꿈차롱작은도서관’. 지난 2009년 겨울에 문을 연 작은도서관으로 이제는 성공적 운영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 개관 초기 주민들과 관계설정 문제로 고민도 많았지만 지금은 주민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고 있다고. 또 도서관 독서 지도사들도 모두 주민들로 이곳에서 교육받고 자격증을 땄다. 공간 활용도 독특하다. 복지회관으로 사용되던 건물 2층은 도서관으로 이용하고 곡물 건조기가 설치돼 있는 1층을 카페로 꾸며 사랑방으로 만들었다. 농번기때는 건조장으로,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방문객이나 주민들의 공간으로 이용할 수 있다. 양민숙 관장은 “근처 재릉초등학교 학생 수가 몇 년 사이 30여 명이 늘어 통폐합 얘기가 쏙 들어갔다”며 “도서관을 통해 아이들이 성장하고 부모들이 인정해주는 것 같아 보람있다”고 말했다.

▲ 선인장 마을.
 

금능 절경이라는 ‘해가 비양도 뒤로 내려앉는 일몰’을 보지 못해 아쉽지만 선인장 마을로 알려진 월령마을로 향했다. 그러나 그 곳에서 가장 먼저 들은 이야기는 ‘무명천 할머니’ 이야기였다. 4.3 당시 토벌군의 총탄에 턱을 잃어버려 평생을 무명천으로 가리고 살다가 2004년 90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나신 진아영 할머니가 살던 집이 이 마을에 있다.

▲ 무명천할머니 집안 전시물

한담 돌에 ‘무명천할머니 삶터’라고 쓰여진 집은 방 1칸 부엌 1칸의 작은 규모다. 집 안에는 비극이 있기 전 할머니의 사진과 무명천을 둘러쓴 할머니 사진이 방에 걸려 있으며 손수 쓰시던 생활용품과 이불 등이 그대로 전시돼 있다. ‘그저 죄송합니다’라고 적은 어느 대학생 방문 기록에 눈길이 간다. 동네 주민들은 ‘살아 생전에 잘해주지 그랬냐’고 하지만 4.3을 제대로 말하지 못했던 시절이 길어졌고 이제라도 그 분의 아픔을 같이하려는 뜻이 있으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무명천 할머니 삶터 입구

모슬포 항 입구에 들려 아버지가 운영하시던 이발소를 카페로 바꾼 ‘해성 이용원’에서 커피를 마시고 안성리로 향했다. 추사 김정희가 1840년 누명을 쓰고 이곳에 9년간 유배됐던 지역으로 현재는 생가 복원에 이어 ‘서귀포 김정희 유배지’라는 이름의 기념관까지 들어섰다. 제주 음식이 입맛에 맞지 않아 부인에게 편지를 보내 반찬을 보내도록 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두말할 나위 없이 훌륭한 분이지만 입맛은 상당히 까다로웠던 분 같다.
비교적 작은 키에 온화한 모습을 하고 있어 제주시내 돌하르방과 비교되곤 한다는 유배지 앞 도로 건너 맞은 편 앞에 있는 돌하르방을 끝으로 일정을 마무리한다.
요즘 제주도에는 한치를 찾는 사람들이 많다. 이제 막 잡히기 시작한다는 한치를 먹으러 다시 제주시내로 향한다. 사장이 직접 배로 잡는다는 한치, 물회보다는 한치회가 더욱 맛있다는 도움말을 끝으로.
/이병재기자·kanadasa@

 

▲ 앞쪽 우영팟과 안거리, 밖거리

김병심의 제주, 제주 사람 이야기
-제주에 왕(와서), 방(보고) 갑데강(가셨나요)

▲ 김병심 시인

1. 안거리 밖거리
제주에는 집들이 나지막하게 자리 잡고 있다. 바람의 영향으로 돌담도 나지막하고, 마당 깊이 들어간 집과 나무들도 바람을 견디는 형태가 많다. 지금은 옛날의 초가집을 볼 수는 없고, 그 다음 가옥형태인 함석지붕의 돌집과 바람에도 단단한 벽돌집들이 많이 남아 있다. 올레길을 걷다가 작은 마을을 지날 때면 한 울타리 안에 두 가옥이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올레길의 상징처럼 주황지붕과 파란지붕이 마주 보고 있는 형태이거나 같은 색으로 칠해진 지붕이지만 분명 두 살림의 흔적이 남아있다. 대문 가까이 자리 잡은 바깥채를 ‘밖거리’라 하며 이 곳에는 자식부부가 산다. 마당 안쪽에 자리 잡은 안채를 ‘안거리’라 하며 시부모가 산다.
  육지에서의 안채는 여성, 바깥채는 남성이라는 남녀 분리 공간으로 볼 수 있지만, 제주에서는 세대별 분리가 강조 된다. 부모의 가족과 자식부부라는 두 가족이 사는 셈이다. 또한 정지와 고팡을 따로 소유하고 있어서 밥을 따로 해먹고, 소유하고 있는 경작지나 곡식을 쌓아두는 곳간의 소유도 각기 분리되어 있다. 
  안거리의 뒤란에는 ‘우영팟’이라고 부르는 조그만 밭이 조성되어 있다. 푸성귀를 심어 사시사철 푸른 채소를 심어 식사 때마다 싱싱한 채소를 먹는다. 우영팟과 돌담의 경계에는 감나무와 밀감나무를 심어두어 길가와 다른 집을 가려주는 차양 역할을 하게 하였다. 여름에는 땡감(풋감)을 따서 감물을 들여 갈옷을 만들어 입었고, 귤나무의 품종으로는 차를 끓여 마실 수 있는 댕유자를 심거나, 마당에 등을 켜 놓은 것처럼 초여름까지 달려있는 하귤인 경우가 많다. 묵은 김치와 간고등어를 먹는 것보다 제주인들은 그때 그때 바다에서 채취하는 해산물과 우영팟에서 따온 채소들로 밥상을 차렸다. 로컬푸드와 친환경 먹거리로 제주의 노인들은 건강하고 왕성한 노동력을 자랑한다.
  가옥의 구조는 방과 마루, 정지(부엌), 고팡(소규모 곳간)이 있다. 제주도에서는 집안의 부를 축적하는 고팡을 중요시 여긴다. 고팡은 그 집안의 권력과 경제력을 상징한다. 고팡은 안거리와 밖거리에 각각 존재한다. 즉, 제주 여성은 결혼을 하면 독자적인 고팡을 갖는다는 의미이다. 제주 노인들은 쉼없이 할망바다에 나가 물질을 하거나 귤을 따러 가거나, 할망장에 가서 수확물을 내다팔기도 한다. 풍족한 노후생활을 위해서나 건강을 위해서 끊임없이 몸을 움직이고 넉넉한 삶을 영위한다. 또한 자식 부부가 출타를 하거나 일이 바쁠 때에는 밖거리의 아이들을 보살펴준다. 어른들의 품에서 자라기 때문에 아이들은 어른들이 낯설지 않고, 섬김을 배운다. 또한 시어른의 출타 시에는 날래(길가나 마당에 널어두는 곡식)를 거두어 들여주거나, 고부간에도 수눌음으로 경작지에서 수확을 거들기도 한다. 물론 셈은 서로에게 정확히 쳐준다. 한 울타리 안에서의 세대별 독립주거형태는 고부간의 갈등을 줄이고, 서로 매일 오고가면서 살피기 때문에 부모 중에 한 분이 홀로 살게 되신다 해도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간섭이나 봉양에 대한 부담이 줄기 때문이다.
  자식부부가 일정기간 밖거리에서 살게 되면 부모는 안거리와 밖거리를 바꿔 살게 한다. 즉, 조상에게 제사를 드리는 일, 제수를 보관하는 일 등을 자식에게 물려준다는 의미이다. 안거리에서 집안의 대소사를 주관하기 때문이다. 물론 공동체적인 삶을 유지하기 위한 친족의 일, 부조, 공동 재산권 행사등도 도맡아 하라는 암시인 셈이다. 밖거리로 물러난 시부모는 공동체적인 권력과 경제력을 자식부부에게 양도를 하고는 자식부부가 행했던 것처럼 노후의 자신들을 위한 소박한 삶을 영위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반독립적인 형태가 고부갈등을 줄이고 노년에도 왕성한 노동력을 갖게 하는 원동력이 아닐까 싶다.
  마당과 우영팟, 안거리와 밖거리의 평수를 다 합해도 대형 아파트의 평수를 넘지 않는다. 도시형 주거형태와 분가, 늘어나는 수명에 대한 대안을 제주인의 주거형태에서 찾아보아도 좋겠다.

2. 팡!

▲ 팽나무(폭낭)와 돌평상(쉼팡).

마을 어귀마다 정주목인 팽나무가 서 있다. 일명 ‘폭낭’이라고 불리는데 신당과 쉼팡(정자나무)으로 쓰였다. 육지로 치자면 느티나무쯤 될 것이다. 큰 폭낭 한그루가 있으면 여름철 내내 아이들은 나무에 기어 올라가 폭낭 열매를 따먹었고, 어른들은 나무 그늘에 앉아 한여름을 났다. 폭낭은 강인한 제주 정신의 상징이기도 하다. 추위와 염분에 강하고 바람에 강하다. 바람에 나무가 꺾이면 그 자리에 다시 움이 솟는 강인한 생명력이 있다. 제주를 여행하다보면 한쪽으로 쏠린 폭낭들을 볼 수 있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 탓에 제주도 폭낭은 한라산을 향해있다. 그러면서도 중심을 잘 잡고 서 있는 폼나는 나무이다. 바람을 견딘 고통의 댓가로 예술의 극치를 보여주는 제주의 자연산 예술작품이라 할 수 있다.

폭낭은 물색천을 두른 신당이 되기도 한다. 폭낭에 둘러싸인 여신과 남신의 결합으로 허정승 따님을 신으로 모시며 매년 정월 14일과 7월 14일에 제를 올리는 와흘당이 있다. 제주시 월평동과 영평동 다라쿳당의 폭낭에 좌정한 신당이야기도 꽤 흥미롭다. 남신 신신백관은 한라산에 솟아난 토착신으로 수렵 목축의 신이자 마바람의 신이며 육식을 부정하는 신이다. 여신은 강남에서 온 외래 신으로 농경신이자 하늬바람의 신이며, 쌀밥을 관리하는 깨끗한 신으로 아기를 보살피는 산육신이다. 폭낭에 실린 남녀의 신이 부부의 연을 맺고 좌정한 이야기가 요즘 이주자가 늘고 있어 제주인과 결혼을 많이 하는 풍토와 비슷해서 꽤 흥미롭다. 문화의 섞임과 공존을 보여주는 폭낭신의 이야기이다. 무속철폐에 따른 신당의 수가 감소하고 있지만 숲은 숲으로 봐주는 아량도 필요하다고 본다. 사악한 정령이 깃든 나무가 아니라 제주인의 정서와 이야기를 담고 있는 중요한 문화자원이니 말이다.

폭낭의 또다른 용도가 있다. 굵고 커다란 폭낭의 그늘이 드리워지는 원둘레 만큼 단단한 돌평상을 만들어 놓은 걸 볼 수 있다. 이를 ‘쉼팡’이라고 부른다. 쉼팡은 쉬는 팡의 준말로 마을의 큰 나무 그늘 아래 쉴 수 있게 놓여 있는 넓적한 돌을 말한다. 마을 사람들이 여기에 모여 서로의 안부를 묻거나 마을의 대소사를 의논하곤 하였다.

지인들과 제주 마을길을 걸을때마다 우스갯소리를 늘어놓곤 한다.

“ 저기 보이는 쉼팡에는 아무나 앉을 수 없답니다. 60세 이상 어르신들만 앉을 수 있어요.”

마을 길을 걷다가 잠시 쉬려는 지인들을 붙잡으며 하는 말이다. 하지만 요즘은 고령화가 되어가는 마을에서 60세는 커녕 70세도 청년회장이 되고 있다. 즉, 쉼팡에 앉을 수 있는 나이가 70세 이상이라는 뜻이다. 60세도 청춘이니 열심히 일을 한다. 그런 분들 앞에서 우리가 취업이 안된다 일이 힘들다고 하면서 쉼팡에서 쉴 수가 없는 것이다. 제주의 노인들은 투잡 혹은 쓰리잡으로 눈,코 뜰 새가 없다.

제주에 이주한 육지 사람들의 공통된 질문이 있다

“왜 제주에는 밤 9시만 되면 마을이 깜깜해요?”

즉, 저녁과 밤의 놀이가 없다는 표현이다. 야간에 마실이라도 나갈라치면 사방의 소등으로 무섭다는 농담 섞인 표현이겠다. 그렇다면 새벽 4시에 일어나 거리로 나가보라고 권한다. 아직 동이 트지 않은 농로나 과수원을 향하는 노인들이 헤드라이트 속에 잡혀 깜짝깜짝 놀란다. 어둠 속에서도 밭으로 나가는 할머니들을 발견하고는 놀라게 될 것이다. 왕성한 노동력과 집념의 에너지로 새벽일을 끝마치고는 한 여름 뙤약볕 아래서는 쉼팡에서 쉬고 계실 노인들을 보라, 햇볕이 사그러지는 석양 한 타임을 놓치지 않고 다시 밭으로 나가 농작물에 물을 주시거나, 바다로 나가 어랭이와 보말을 잡고 돌아오신다. 갓 잡은 바다의 스테미너 음식을 먹고는 불면도 없는 단잠에 빠져 주무신다. 어김없이 다음날 새벽에 일을 나가시는 어르신들의 강인함이다. 어찌 쉼팡에 우리가 앉아 놀 수 있겠는가

나는 ‘팡’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쉼팡처럼 잠시 쉬면서 서로의 노고를 쓸어주고 격려해주는 ‘잠시 쉬어가는 시간’이라고 표현해도 좋겠다. 우리는 일만 하는 기계가 아니지 않는가 인간이기에 괴로움과 말로 풀어내지 않으면 안되는 것들이 있다. 한여름 뙤약볕처럼 삶에 있어서 계획대로 일을 처리하지하지 못할 때, 혼자 감당하기 어려워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할 때 서로에게 ‘팡’이 되어 주는 마음의 휴식 공간을 만들 필요가 있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고 고립과 고독을 시로 표현하신 시인 대신 ‘사람들 사이엔 팡이 있다’ 고 시를 고쳐 써도 좋음직하다. 사람은 결국 서로 말로 소통하고 위안 받으며 다시 살아가야하는 존재가 아닌가 싶다. 이제부터 ‘섬’이 아니라 ‘팡’이 되어 주는 시간을 가져보는 게 어떨까, 나는 누구의 ‘팡’이 될 수 있을까

올레의 입구를 어귀라 부르는데 올레 어귀에는 외부와 집안을 뚜렷하게 구분 짓는 지방돌이 가로로 땅바닥에 박힌다. 어귓돌은 여기서부터 민가의 입구가 시작됨을 암시해주는 기능을 지니고 있다. 이곳에 몰팡돌(노둣돌)이 놓이는 경우도 많다. 올레 어귀에서 민가 쪽으로 들어가면서 올레 바닥의 양 옆에는 다리팡돌를 설치한다. 비가 올 때 신발에 흙이 묻히지 않고 걷도록 배려를 하는 것이다. 이처럼 제주에는 나무와 돌을 가지고 상대방을 배려하는 문화를 만들어 왔다.

▲ 돌담 /사진=강정효

3. 돌담

-어머니와 시계

저녁밥물을 맞추시러 돌아오시는 어머니의 시계는 언제나 정확하셨다

시계를 끼지 않으셨는데도 어떻게 나의 배꼽시계보다 더 정확할 수 있었을까

밭담의 구멍 사이로 젖바라기별이 비추면 골갱이를 내려놓고 바삐 집으로 돌아오시던 어머니

젖줄과 연결된 바라기별이 알람처럼 돌담 과녁에 꽂히는 순간 시계태엽이 돌아갔었지

 

얼래고 달래며 애기구덕 안의 나에게 먼저

젖을 먹이시고는

가족의 저녁밥을 지으셨었지

 

팔순이 넘도록

할망바당에서 물질을 하고

할망장에서 강낭콩과 땡감을 내다팔고 계실 어머니

 

물외냉국에 밥 말아드시면서도

혼잣말로 별바라기와 살고 계실

폭낭 아래의 쉼팡

 

가슴께 구멍 안으로 별이 고이는 걸 보니

손목에 시계자국만 하얗게 남은 나에게

젖을 물릴 시간이라고 말씀하시는지도 몰라

-<어머니와 시계> 시 전문-

제주에 오면 흑룡만리라고 불리는 돌담의 휘어진 자태에 놀라게 된다. 돌담 또한 가슴께 정도나 경계 표시 정도로 낮게 쌓기도 한다. 태풍이 관통하는 매년 여름을 맞이하고도 돌담은 끄떡없다. 쓸려가는 간판과 절단이 난 전봇대와 건물들 앞에서도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엉성하게 쌓았던 돌담만은 그 모습 그대로 태풍을 통과 시켜 버린다.

돌담의 용도는 <동문감>의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힘 있는 토호세력들이 힘없는 백성의 땅을 빼앗는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경계의 목적이라는 뜻이다. 또한 농경을 시작하면서 돌로 뒤덮인 밭(빌레밭)을 개간하였는데 이때 걷어낸 돌덩어리들을 처치하기 위해 쌓은 것을 돌담의 시초로 보기도 한다. 다음으로는 소와 말이 농경지에 들어와 곡식을 훼손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쌓은 것과 조상묘를 보호하기 위해서 쌓은 산담을 들 수 있다.

제주 돌담은 아무나 쌓을 수 없다. 제주의 돌담이 강한 바람에도 허물어지지 않는 이유가 돌담 사이사이에 틈이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는 뜻이다. 제주의 돌챙이(석공)들이 돌을 쌓는 과정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돌담을 쌓는 과정은 먼저 바닥에 담굽을 조성한 후 그 위로 돌담을 쌓아올리는데, 돌담이 완성되면 한쪽 끝에서 돌담을 흔들어본다. 이때 맞은 편까지, 즉 돌담 전체가 유기적으로 흔들거려야 제대로 쌓은 것으로 인정한다. 그렇지 않으면 강한 바람이 불 때 돌담이 무너진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제주 바람은 현재 진행형이다“

많은 화가들과 사진작가들의 작품 속에서 찾아낸 제주바람의 정의가 현재 진행형이라면 “제주의 돌담은 천 년의 바람을 간직한 미래다” 라고 정의내리면 어떨까.

제주 돌담은 그 가치를 인정받아 2013년 1월 국가중요농업유산으로 지정된 데 이어 2014년 4월에는 세계농어업유산으로 등재됐다.

 

4. 반 태우다

반; 잔치나 제사 때 여러군데 나누어 주려는 음식

태우다; (동의어) 테우다. 페우다. 잔치나 제사때 모인 사람들에게 반을 나눠주다

-<표준어로 찾아보는 제주어 사전> 현평효. 강영봉 편저 -

어릴 적 식게(제사)때면 온 동네 삼촌들이 찾아 오셨다. 누구냐고 물어보면 이모와 삼촌들이라고 대답하시는 어머니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자랐다. 학교에서 백부니 당숙이니 하는 명칭을 배우는 순간 우리 동네의 이모들과 삼촌들이 헷갈렸다. 그래서 시험을 치를 때면 촌수가 엉망인 제주 아이들은 울상이 되었다. 제주에서는 ‘이당 저당 해도 괸당이 최고’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지만 촌수를 헤아리는 자체가 힘든 통폐합 호칭은 지금도 여전하다. 식게를 먹으러 오신 동네 어르신들이 집으로 돌아가실 때에는 반드시 반을 태워준다. 식게 음식을 골고루 담은 봉지를 한 손에 쥐어주고 보내는 풍속이다. 가끔 육지에서 오신 분들이 불쾌하게 바라보시며 나무라기도 하셨다. 어째서 남의 조상에게 바친 음식을 나눠주시느냐고 호의를 오히려 불경스럽게 생각하셨다.

제주 사람들은 식게날 다음이면 받아온 반을 밭일이나 직장으로 가지고 가서 사람들과 나눠 먹는 간식타임을 갖는다. 음식 품평회도 되고 반 덕분에 쉼팡에서 티타임을 즐기는 힐링의 시간을 제공한다. 농번기에는 식게 음식이 요긴하게 쓰이기도 한다. 딱히 간식거리가 없는 시골에서는 동네 식게가 반갑기 그지 없다. 거동이 불편하시거나 다른 볼일로 식게에 오지 못한 동네 삼촌집에 찾아가는 것은 막둥이 내 차지였다. 새벽이면 차롱 안에 산적, 과일, 떡을 담고 육고개 너머 심방삼춘 집이나 귀가 먼 할머니 집을 찾아가 음식을 드린다. 새벽은 그나마 나은데 어떨 때는 한밤중에 갖다 드려야할 때도 있다. 그래서 혼쭐이 난 적도 있다. 밤길도 무서운데 심방 할머니집은 얼마나 상상력을 자극하는 집이던가. 담력은 어릴 때 반을 태우며 생긴 게 아닌가 싶다.

최근에 제주에서 잔치나 식게 때 반을 태우는 게 성가셔서 농수산 상품권이나 국수 한 봉지씩 손에 쥐어드리기도 한다. 하지만 음식을 나누는 풍습을 다시 되돌리고 싶다. 사람은 함께 음식을 먹으면서 정이 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제주로 오신 이주자들에게 작은 음악회나 시낭송의 밤을 열었을 때 음식을 싸주었더니 너무나 좋아했다. 그러고는 제각각 집에서 음식을 하나씩 싸오시기도 했다. 서로 나눠먹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제주사람이 되려고 오신 반가운 새사람에게 상품권이나 국수 한 봉지보다 제주 음식을 나눠주는 게 나을 성 싶다. 또한 농번기에 밭일과 물질을 종횡하시는 시골 어른들에게 오랜만에 식게 음식을 싸드렸더니 서로의 마음이 풍요로워졌다. 귀찮아도 반을 태워야겠다.

반 태우다

-식게집 뷔페<김병심>

육고비 너머 남몰래 울어주고 손가락질 받는 할머니가 식게에 안와서, 마씸

끅신 신고 궤의 다리 지나 떡도구리 대신 골채에 반 챙겨 가신디, 마씸

오밤중이라 컴컴한 할머니집 문지방에 서서 할망~ 할망~ 불러신디, 마씸

귀가 안 들리는 할머니, 배롱하게 싼 각지불이 아룽아룽 비치는 걸 보니 자고 계신거라 마씸

반은 태워야 집에 갈 거라고

불 맞은 돌로 항에 맞춰 소리도 내봐신디, 마씸

곱들락한 사과, 전, 산적, 빙떡, 할머니 좋아하는 거 이런 때나 나눠 먹는 거라고

코고는 소리만 들리는 창호지문에 긴 꼬챙이를 찔러 넣고 더듬더듬 할머니를 깨워신디, 마씸

 

깜짝 놀란 할머니, 간 떨어지는 호통에 쏟아버린 골채 안의 반

그날부터 할머니 꼬박꼬박 식계 먹으러 와서 나를 부르는 거라 마씸

이 궁퉁이 막아진 년아!

 

-제삿집 음식

무당 할머니가 제사에 오지 않았어요/ 짚신 신고 궤짝 같은 좁은 다리 지

나 떡함지 대신 삼태기에 음식 챙기고 갔는데요/ 한밤중이라 캄캄한 할머

니집 문지방에 서서 할머니~할머니~라고 불렀는데요/ 귀가 어두운 할머니,

희미하게 켠 등잔불이 아룽아룽 비치는 걸 보니 자고 계신 게 분명한 거예

요/ 반은 드리고 와야 집에 갈 거라서/ 송이돌을 던저 물항아리에 맞춰 소

리도 내봤는데요/ 먹음직스러운 사과, 전, 산적, 빙떡, 할머니가 좋아하는 거

이런 때나 나눠먹는 거라서/ 코 고는 소리만 들리는 창호지 문에 긴 꼬챙이

를 찔러 넣고 더듬더듬 할머니를 깨웠는데요/ 깜짝 놀란 할머니, 간 떨어지는

호통에 쏟아버린 삼태기 안의 반/ 그날부터 할머니는 꼬박꼬박 제사에 오셔서

저를 부르는 거예요/ 이 요령없는 년아!

* 잔치나 제사 후에 여러 가지 음식을 조금씩 담아 나눠주는 것.

▲ 물질을 끝낸 해녀.

5.해녀

제주의 아름다운 해안가 중에 차귀도가 보이는 고산리에는 나의 시누이가 물질을 하고 계신다. 가까운 이웃마을에 팔순이 넘은 시어머니께서도 물질을 하시지만, 상군이라 불리는 최고 고수인 시누이의 물질 앞에서 내 입은 벌어지고 만다. 나의 첫 아들 출산 때 북바리 (다금바리보다 한 수 위의 어종)를 작살로 쏘아서 잡아주신 분이시다. 지금은 누님을 닮은 남편과 시아주버님들이 벵에돔과 돌돔을 낚시대로 잡아 주시지만 누님의 작살 솜씨를 따라 갈 수가 없다. 집안의 대소사에 어김없이 잡아오시는 게영국(탕국) 거리와 소라, 전복, 성게, 문어 등 모든 상차림의 재료는 누님의 손길을 거쳐야만 했다.

 

▲ 잡은 해삼을 손질하는 해녀.

제주 해녀들은 추운 겨울에도 바다에 들어가 해삼과 전복을 채취한다. 물살이 세거나 눈발이 날리는 날에도 나의 시누이는 아무렇지 않은 듯이 바다로 나가신다. 그리고는 전화를 걸어와 전복과 해삼을 가져가라고 하신다. 가끔 육지에서 오신 손님들과 횟집을 가게 되면 자연산 해산물과 고기들의 가격을 가늠할 수 있다. 그리고 양식 어종에도 감탄을 연발하며 드시는 손님들 속에 섞여 새삼 시누이가 나에게 쏟는 애정을 실감하게 된다. 시누이는 어마어마한 시가를 받고 팔 수도 있는 자연산을 아낌없이 동생 내외들에게 주신다. 가끔 받기 송구스러워 손을 내저으면

“공 갚을 데 있으면 선사하라.”

시어머니와 똑같은 말씀을 하신다. 시어머니의 성품을 닮은 분이시다.

제주는 해안을 따라 풍광을 보며 달릴 수 있는 도로가 있다. 하지만 서귀포와 제주시 사이의 급한 볼일로 빠르게 가야 할 때는 일명 산업도로라고 불리는 도로를 타고 횡단해야 한다. 이 도로 가까이에는 말과 소들이 보이는 초원과 들불축제로 유명한 새별오름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안개를 만나게 되면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다. 결빙과 폭우보다도 무서운 것은 안개이다. 짙은 안개를 만나면 대책 없이 엉금엉금 직감으로 차를 몰아야 한다. 자칫하다가는 능숙한 길이라도 중산간 낯선 마을에서 멈추게 된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신의 마법에 걸린 듯 중산간에서 길을 잃고 머리를 긁적일 수도 있다. 제주의 바다 속이 이러할진대 시누이는 팔뚝만한 전복을 캐시고는 생물을 먹일 요량으로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나는 급한 마음에 산업도로를 탔다가 짙은 안개를 만났다. ‘아, 전복을 먹을 욕심에 내가 죽는구나...’ 다시 제주시로 돌아갈까 하는 마음을 접고 엉금엉금 차를 몰고 안개를 뚫고 고산리 까지 전복을 향하여 갔다. 안개를 뚫고 가는 동안 시누이의 목숨과도 같은 물질과 수궁에 든 심청이와 이렇게 캔 전복을 아무 대가없이 손아래 올케에게 줄 수 있을까 하는 감탄이 경이로움으로 바뀌었다. 나 또한 목숨이 위태로워 봐야 상대방을 이해한다는 어리석은 깨달음들이 교차했다. 산업도로를 빠져나와 이시돌 목장을 돌아 저지오름을 지났다. 아득하게만 보였던 시누이가 사는 고산리 마을은 저녁 별들과 낮은 지붕들이 아기자기하고 평화로운 모습으로 고요히 자리 잡고 있었다. 초죽음이 되어 시누이에게 찾아갔더니 시누이는 해삼을 캐면 다시 전화하마 하며 나를 막둥이 여동생 대하듯 감싸주셨다. 물론 돌아오는 길은 안개가 없는 해안도로를 따라 금능과 협재, 애월을 지나는 안전모드를 택했다.

▲ 해녀 목욕탕 탈의실.

해녀들은 수압을 견디기 위해서 귓구멍이 점점 작아진다. 바람의 영향으로 목소리가 크고 단답형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을 자칫 전투적으로 오해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물질을 오래 하다보면 귀가 수압에 맞게 변형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해녀들은 상대방의 말을 잘 듣지 못하기 때문에 큰소리로 의사표현을 한다. 육지 여자들처럼 자분자분 이야기할 처지도 못 된다. 할 일이 많아서 마음이 급하기 때문이다. 혹시 해녀 할머니들이 잡아 올린 해삼과 성게 앞에서 질문을 하다가 단답형의 무뚝뚝한 대답을 들으신 육지분들 이시라면 이러한 점을 알아주시고 이해해주시길 바란다.

해녀들은 바다에만 가는 게 아니다. 물때가 아닐 때에는 마늘을 수확하고 참깨를 장만하고 양배추, 양파, 브로콜리 등 밭일을 하신다. 물론 마을의 단합대회 경조사에도 수눌움(품앗이)으로 서로를 거들어 준다. 또한 제주의 바다에 물건이 없을 때에는 일본으로 가거나 육지로 나가 물질을 하다가 돌아오시곤 한다. 나의 시누이도 그렇다. 오십을 넘은 시누이는 해녀 중에 젊은 축에 끼므로 쉼팡이나 불턱에 앉아 놀 수가 없는 까닭이다.

두 해전부터 8월이면 돌문화공원에서 양방언씨가 주축이 되는 음악회가 열렸다.

세계적인 뮤지션이라 익히 많은 관객이 몰려들었고, 가슴 설레며 기다리는 음악회이기도 했다. 제일교포이고, 제주 협재리가 고향이라는 양방언씨가 제주를 위해 음악적 재능을 기부하시는 모습에 팬으로서 무한 감동과 사랑을 전하고 싶다. 다른 장르의 뮤지션과 가수들 공연도 볼만 했지만 나를 사로잡은 것은 현직 해녀 할머니들이 나와서 부르는 해녀의 노래였다. 제주 해녀들이 부르는 노래가 동경 행진곡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어 현기영 소설가의 가사에 새로운 곡을 만들어 주었다는 것에 박수를 치고 싶다. 이 곡을 해녀 할머니들이 소중기를 입고 태왁까지 들고 나와서 부르는데, 모든 관객들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8월에 제주를 찾을 계획이시라면 돌문화공원에서 열리는 음악회와 구좌에 있는 해녀 박물관을 둘러보시길 권한다.

자, 저와 함께 고블락(숨박꼭질)하는 제주의 문화와 삶을 뽕글락(배부르게)하게 드셨나요. 즐겁게 제주에 왕(와서), 방(보고) 갑데강(가셨나요). 다음에도 소박하지만 대장부 같은 포부로 섬을 가꾸는 제주인의 삶과 기질을 느껴보는 여행을 위해 열심히 살고 계십써양^^

-김병심은 제주 토박이 시인으로 1997년에 등단한 중견 작가. 시집 ‘울기 좋은 방’, 동화집 ‘바다별 이어도’ 등 여러 권의 시집과 동화집을 펴냈다. 제주문인협회 시분과 위원장, 한라산 문학동인으로 활동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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