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 케고르는 “나는 걷는 동안 가장 좋은 생각들을 떠올렸다”고 했고 독일 철학자인 니체는 “걷지 않고 떠오르는 생각은 믿지 말라”고 했다. ‘동의보감’의 저자 허준은 ‘약보보다 식보가 낫고 식보보다 행보가 낫다’고 언급했다.

현대인들 또한 건강을 지키려고 혹은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걷고 있어 각 지자체에서 길 만들기 붐이 일어나고 있는 상황. 문화사학자이자 도보여행가 신정일이 생각하는 길의 미학은 무엇일까. 그는 과거 누군가처럼 산천을 유람하는 건 좋은 책을 읽는 것과 같다는데 뜻을 같이 한다.

길은 수없이 많은 책들이 펼쳐진 도서관이자 역사의 유물들이 진열된 박물관이라고 여기는데 이 땅의 곳곳을 걷고 또 걸으며 삶이란 것을 깨달아서다. 최근 펴낸 ‘길에서 만나는 인문학’에서는 전라북도의 옛 길과 그 곳에 얽힌 인문학적 보고들이 쉴 새 없이 쏟아진다.

모두 4부로 구성된 책은 각각 ‘역사’ ‘사찰’ ‘길’ ‘자연’을 논한다. 삼남대로와 통영대로 같은 옛길부터 모악산 마실길, 강화 나들길, 변산 마실길, 소백산 자락길 고창 질마재길, 전주 천년고도 옛길 등 저마다의 특색을 지닌 오늘날 길에 이르기까지 나열하는 한편 그 속에 깃든 사회, 문화, 역사를 풀어낸다.

단순히 원고를 목적으로 걸은 게 아니라 오랜 시간 도보를 생활화해 온 만큼 정보를 나열하는 수준을 넘어 깊고 넓은, 정교하게 다듬어진 사유를 던진다. 그 중 부안 마실길과 관련해 명기이자 문인인 매창을 보면 이미 잘 알려진 허균과 유희경과의 관계를 깊이 있게 다룬다.

‘홍길동전’ 저자인 허균과 마음만은 누구보다 가까웠으나 연인인 시인 유희경을 의식해 항상 거리를 유지했을 거라 추정한다. 허균 또한 유희경에 못지않은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그러면서 매창이 유희경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시 ‘이화우 흩날리제’와 매창의 죽음을 슬퍼하는 허균의 시 ‘매창의 죽음을 슬퍼하며’를 전한다.

지리산 자락에 자리한 남원 실상사는 신라 구산선문 중 최초 산문인 실상사파의 본찰로 우리나라 불교사상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으며 국보 10호로 지정돼 있는 백장암 삼층석탑을 비롯해 보물이 11점이나 있어 단일 사찰로는 가장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수평선을 볼 수 있는 호남평야는 전주, 익산, 정읍, 군산, 김제 등 5개 시, 군을 비롯해 완주, 부안, 고창 등지에 광범위하게 걸쳐있다. 그 중 대표적인 게 김제평야와 만경평야인데 이를 위해 우리나라 최초의 저수지 벽골제가 만들어졌다.

‘택리지’의 저자 이중환이 “두 줄기 물이 감싸듯 하여 정기가 풀어지지 않아서 살만한 곳이 대단히 많다”고 말했던 이곳은 일제강점기를 겪은 후 몇 가지 유물과 넓은 평야로만 남게 됐다며 아쉬움을 토로한다.

저자는 여는 글을 통해 “정약용의 글처럼 세상의 길속에서 어정거리고 글 속에서 어정거리다 보니 나름대로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했다”면서 “고즈넉하면서도 아름다운 옛길과 그곳을 걸으며 이 땅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사람들의 이야기를 주목해 달라”고 밝혔다. 신아출판사. 347쪽. 20,000원./이수화기자·waterflower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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