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고 시인 김춘수는 썼다. 온갖 꽃들이 카펫을 깔듯 세상을 덮어가고 있는 봄날에 김춘수 시인의 “꽃” 한 소절을 떠올리는 것은 참으로 너무나 당연한 것일 터이다. 그런데 이름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었다. 설령 그것이 이미 꽃이었던들 내가 그 이름을 부르기 전에는 그렇게 의미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이름은 영혼이고 실체인가 보다. 발산(鉢山)이 그렇다. 이름대로라면 스님의 밥그릇처럼 생긴 산이라는 뜻이 아닐까? 혹은 불가에서 오래전부터 전해지는 물건들을 일컫기도 한다. 그렇게 생긴 산자락 사실 산이라고 부르기에는 부끄러워 보이는 낮은 언덕에서 그 이름의 실체를 보았다.
군산 개정면 발산리에는 보물로 지정된 석등을 비롯해 석탑과 부도 등 다양한 불가의 기념물들이 모여 있다. 발산리는 아무리 엮어보아도 부처가 머물기에는 누추하고 평범하였다.  발산은 남북으로 길게 꾸며진 개정의 한 중심에 있어 사실상 개정과 발산은 한 몸이라 할 듯하다. 북쪽의 성산 끝자락이며 남쪽으로 너른 들 대야가 있다. 예전에는 동쪽의 임피가 제법 큰 고을이었었나 보다. 지난 18세기에 펴낸 여지도서(輿地圖書) 중 임피에 “개정제(蓋井堤)는 관아의 서쪽 20리에 있다”고 했다. 개정이 덮어놓은 우물이란 뜻이니 분명코 그 숨은 내막이 있었을 터이다. 일제에 의해 “개(蓋·盖)”에서 “개(開)”로 바뀌었다니 어쩌면 남쪽 큰 들이었던 대야(大野)를 적시려 했던 모양이다. 오랫동안 닫혀있었던 우물의 뚜껑이 열려야 할 시대가 온 것이리라. 비록 그것이 이 땅의 아픔이고 상처로 남을지언정 어쩔 수 없었던 운명인지도 모른다.

그 슬픈 운명의 자취를 발산리에서 만나야 했다. 발산리에는 우리의 보물인 석등과 석탑 등 여러 유물들이 비밀스럽게 감춰져 있었다. 꽃은 지천에서 앞 다퉈 피고 있었지만 이곳은 한적하고 우울하였다. 봄빛은 가볍고 맑았지만 무거운 바람이 간간이 이곳을 스쳐가고 있었다. 한반도 중동부 지역에서는 비 소식이 들려왔다. 이곳 발산리 하늘에도 제법 짙은 회색구름 덩어리가 무거운 그림자를 내려놓곤 하였다. 그래도 마치 촛불의 불꽃처럼 가벼운 몸매를 가진 자목련의 자태에서 심술궂은 봄날의 황사바람도 어쩌지 못하는 곳이었다. 그런 봄날에도 발산리 석등과 석탑들의 한숨이 검은 이끼처럼 깊게 피어있다.
 발산리 석등이 지난 천여 년 동안 함께 등불을 밝히며 부처를 모시고 있던 불탑 등을 대리고 완주 고산의 봉림사에서 이곳 발산리로 자리를 옮긴 것은 아주 슬픈 일이었다. 그것은 석등의 슬픔을 넘어 민족의 아픔이었다. 일제에 의해 이 땅이 수탈을 당했던 그 증표가 석등에 있었다. 한일합방이 되자 일본에서 주조장을 하던 일본인 시마타니 야소야라는 사람은 주조원료로서 값이 싼 조선의 쌀을 얻기 위해 군산에 스며들었다. 그리고 스스로 쌀을 얻기 위해 1903년 발산리 인근 토지뿐만 아니라 부근 일대의 땅을 매입하고 거대한 농장을 만들었다. 그의 가옥과 농장이 지금의 석등과 여러 석물들이 있는 발산초등학교 자리였다. 그러나 그는 이 땅의 생명이었던 쌀만 수탈한 것이 아니었다. 각종 문화재들을 일본으로 가져가기 위해 이곳으로 옮겨왔다. 우리 선조들의 핏방울 같았던 많은 문화재들을 비밀스럽게 그의 창고에 감추었다. 지금 이 석등도 후일 일본으로 가져갈 심산이었을 터이다. 그 요망스럽고 어두운 곳이 소위 시마타니 금고라 불리는 3층 건물이었다. 지금 발산초등학교 건물 뒤편에 석물들과 함께 남아있다.

석등은 발산초등학교 뒤뜰 매우 비좁아 옹색한 공간에 갇혀있었다. 낮은 철제 울타리가 경계가 되어 그나마 위로가 되었을까. 봉림사에서 함께 온 석탑과 함께 30여기의 각종 석물들이 서로를 위로하며 한 세기 가까이를 견뎌온 것이다. 그 유물들 중에서 석등은 대표적이라 한다. 2.5m 가까이 되는 큰 키에 몸체는 웅장하고 우람한 것이 꼭 여느 부잣집 집사를 닮았다. 생김새는 투박하나 피부도 매끄럽고 선이 맛스럽다. 특히 팔각으로 된 머리 돌이  중량감이 풍부하여 위엄을 높게 하고 있는데, 그 모서리 부분이 살짝 치켜 올라 한결 여유 있는 품격을 담았다. 무엇보다 몸체 전반에 아름다운 연꽃이며 용 그리고 사천왕이 조각되어 웅장한 체구에도 불구하고 우아한 자태가 아름답다. 허리 부분인 간주석에 이처럼 용이 조각된 석등이 한반도에는 없다고 하니 더욱 신기할 따름이다. 용은 간주석의 몸체를 사선으로 휘감아 돌며 힘차게 구름 속을 날고 있는 형국이다. 아마도 오늘이 그 날인 듯하다. 비를 머금은 무거운 구름이 오락가락하는 오늘, 석등 앞에서 마치 불꽃처럼 피어오른 자목련이 잔바람에 하늘거리는 봄날이 그날인 듯하다. 겨우 땅을 비집고 선 작은 풀꽃들도 예사롭지 않은 광경에 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는 모습이다. 작은 풀꽃들의 흔들림은 어쩌면 화사석에 조각으로 내려온 사천왕들의 위엄에 놀란 것인지도 모르겠다. 불을 밝히는 화사석은 사각의 모서리를 좁게 다듬어 팔각모양으로 하고 넓은 면에는 불꽃이 드나드는 화창을 액자 틀을 한 타원형으로 내었고, 그 좁은 면에 사천왕을 조각하였다. 갑옷을 입고 창을 들었으며, 발아래에 엎드려 있는 죄 많은 중생에 위엄을 보이고 있다. 아직도 석등에 불이 켜지지 못하는 역사를 탓하고 있는 것일 것이다. 다만 발산, 그 이름을 지켜주는 일로 위안을 삼아 오늘을 견디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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