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장산이 복룡재를 통해 내려 보내는 자신의 혈액과 같은 맑은 물은 산 아래 첫 마을인 순창 복흥 서마리 앞을 돌아보고 한가하고 여유롭게 흘러 섬진강을 만들었다. 순창에서 섬진의 의미를 읽으려면 서북쪽 끝에서 마치 저고리 앞섶을 살짝 펼치듯이 하고 서있는 내장산을 찾아야만 한다. 지금은 서마리 좌. 우에 매끄럽게 다듬어 쉽게 달려갈 수 있는 길이지만, 실상 섬진 물의 출발지의 하나인 이곳은 깊고 깊은 첩첩산중이었다. 어찌나 물이 맑은지 거울삼아 얼굴을 비쳐 볼만도 하다. 그 내장 심중에서 흘러나오는 물빛에 속세의 빚을 갚아야 할 것 같은 불안감이 감도는 것도 예사 일이 아니다.   
 섬진강은 한반도 남부의 동.서를 가르는 것으로 이해되지만 실상은 이 땅의 풍요와 넉넉한 인심을 아우르는 말이다. 섬진(蟾津)강이 두꺼비가 머무는 물이라는 뜻이고, 두꺼비는 달신(月神)의 표상인 것은 이미 알고 있다. 그래서인지 마치 맑은 하늘에서만 빛이 나는 은하수처럼 아득하고 고요한 모습이다. 달신이 가끔 몸을 적시고 가는 은하수는 하늘의 견우와 세상의 직녀를 이어주는 건널목을 놓는다. 비록 일 년에 한번이지만 그 이벤트는 온 세상이 하나로 엮이는 거룩한 축제이기도 하다. 섬진강은 그런 의미를 지녔다. 그것은 또한 오늘 날 판소리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우리 소리로 풀어낸 것으로도 이해된다. 시원하게 울리고 또한 눈물 나게 웃기며 이 땅 백성들의 가슴 바닥을 후벼내어 속을 후련하게 풀어내는 그런 소리다. 그 소리를 환웅을 수행한 풍백이 하늘에서 가져왔다.
 풍백(風伯)은 이 땅 백성들의 애환을 안아주기 위해 소리꾼 송흥록을 지리산 운봉에서 키워냈다. 그 때가 지난 1780년경, 그런데 그것은 완벽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잠시 기다리다 1835년에 다시 섬진강의 다른 발원지인 내장산 자락에 박유전을 보냈다. 그 박유전을 통해 오늘날 우리 민족의 가장 뛰어난 유산으로서 판소리는 비로소 완성되어졌다. 왜 그들이 하필이면 깊고 깊은 산골,  지리산 운봉과 내장산 복흥에서 태어나야 했는지는 참으로 비밀스러운 것이었지만 그러나 이제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내장(內藏)이 이미 그 역사, 내력을 들려주는 이야기책이라는 것을 밝혔기 때문이다. 태백이 전라도에 마치 보물을 하나씩 숨겨두듯이 모악, 내장, 무등 등을 내려놓았다. 그 중 내장은 그 비밀의 경전이라 할 것이다. 우리 소리의 한 축인 서편제를 시작한 박유전이 내장산 아래 복흥에서 태어난 이야기가 그 속에 있음이다. 
 

박유전(朴裕全 1835-1906)이 살았던 시기는 그리 오래된 것이 아니다. 수천 년의 역사를 지닌 우리 소리가 완성된 것이 실상 불과 한 세기 전이라는 뜻이다. 그렇더라도 박유전이 태어난 복흥면 서마리는 참으로 낯설고 외로운 곳이었다. 서마리는 순창 복흥면 서북쪽에 자리했다. 모두가 내장산의 품안이지만 동남으로 뻗어 내린 백방산이 서남쪽으로 급히 돌아 내려오다가 다시 솟아오른 것이 516m 높이의 기동산이고, 서마리는 이 자락에 앉아있다. 어찌 특별하지 않겠는가. 이 자리가 소리의 새 싹이 돋을 만한 곳이었다. 동네 이름이 상서로운 말(瑞馬)이라 하니 아마도 이 말은 박유전을 태우고 온 것임이 분명하다. 박유전이 내장의 어깨 밑에서 태어난 연유를 아는 것은 실상 그리 어렵지 않다. 내장은 지리산의 어떤 깊은 의지를 담아 오랫동안 준비해온 내력이 있음이다. 말하자면 그의 품 한가운데에서 내어준 어떤 특별한 밀서를 내려 보내 주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름을 내장(內藏)이라 하였고,  그리고 그 내용을 섬진강과 함께 풀어냈다.
 박유전이 내장산의 복룡재에서 솟는 섬진강 물을 받아 태어났지만 그의 부모마저도 실상 그의 태생의 비밀을 알지 못하였다. 더욱이 어려서 눈을 다쳐 외눈으로 지내면서 서러움을 키웠다. 그러나 그 장애가 오히려 그를 더욱 단단하게 다듬어 소리꾼로 이끌어 갔다. 명석하고 천부적 재능이 뛰어났던 그가 장애라는 고독함을 소리에 담았던 것이다. 형이 하는 소리를 듣고 스스로 깨우쳤다하니 이는 실상 수천 년 전부터 준비된 풍백의 계획된 의도라 할 것이다.
 

그의 소리는 이처럼 복흥에서 발아(發芽)하였지만, 정확한 시기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18세 무렵에 전남 보성 강산으로 옮겨가 완성했다. 하필이면 섬진강 서쪽 바다가 가까운 너른 들녘이 있는 강산으로 가야했다. 사람들은 서편제를 설명하면서 섬진강을 중심으로 하고 전라도 서쪽의 소리를 그렇게 불렀다. 보성. 나주, 고창 등에서 부르는 소리를 서편제라 한다는 것이다. 한반도 백성들의 한이 작지 않지만 웬일인지 이들 지역의 삶에 더욱 애달픈 까닭이 있었나 보다. 이들의 서글픈 소리를 계면조(界面調)라 한다. 매끄럽고 가벼우며, 정교하고 세밀한 꾸밈소리는 뼛속 깊이 스며든다고 하였다. 마치 남도의 가벼운 물결처럼 이어지는 산세의 지형을 묘사하듯 느리고 유연하다고 말한다. 그와 같은 박유전의 소리를 강산제라 불렀다. 대원군 이하응이 또한 “네가 강산이다” 하였다 하나 그 의미는 남다르다 할 것이다. 이 강산제가 강물처럼 흘러나가 서편제가 되었던 것이다.
 강산(江山)은 산수(山水)라는 말과 같고 이는 하늘과 땅을 말하며, 세상을 아우르는 말이다. 박유전의 소리를 통해 이제 이 세상의 판소리가 다 마무리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찌하여 동편제의 송흥록이 운봉에서 나고, 서편제의 박유전이 복흥에서 났단 말인가. 이는 두 소리가 신의 음성임을 설명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박유전이 굳이 강산으로 갔다는 것은 말하자면 풍백이 그를 지상으로 내려 보내 땅의 소리까지 엮으라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이들의 삶은 운명이라 할 것이었다.
 태풍 므란티가 추석 한가운데에서 무거운 바람을 몰고 내장에 들어섰다. 이 바람 끝에 단풍은 익어갈 것이고, 그 붉은 빛은 신의 음성이라 할 것이다. 내장이 오랫동안 들려주고자 했으나 우리가 읽을 수 없었던 소리이다. 그래서 아마도 박유전을 보내 들려주고자했을 것이 틀림없어 보인다. 오늘 미미하고 초라하게 복흥 서마리에 남겨진 그의 생가의 모습처럼 우리는 어쩌면 희미하게나마 짐작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우리가 박유전의 소리를 통해 신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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