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녀가 유별하였고, 사람의 신분이 엄격하게 구분되었던 시절에 여성이 역사에 기억되는 일은 참으로 쉽지 않은 일이었다. 어쩌면 사람이 신이 되는 일 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오래전에는 실로 그것은 부처님의 일이라 아니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조선 초기에 “광덕산 부도암도(廣德山浮圖庵圖)”를 남긴 설씨부인의 경우가 그러했다. 이름이 없다는 것은 존재가 없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그런 시절에 그녀는 역사를 기록했다. 
 순창에는 오래전부터 부처가 계셨다. 하기야 부처는 처처(處處)에 머무신다 하였으니 어느 곳인들 부처가 머물지 않은 곳은 없다 하겠으나 그렇다고 불심(佛心)을 쉽게 들어내지는 않는다. 부처님이 이 땅에 언제부터 계셨는지 가늠하기는 어려운 일이겠으나 이곳 순창 광덕산에서는 오래전부터 부처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그곳을 광덕산 부도암이라 불렀다. 광덕산(廣德山)은 지금의 강천산(剛泉山)을 그렇게 불렀다 한다. 그 이름에서 예사롭지 않게 부처의 마음을 읽을 수 있게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덕을 세상 밖으로 널리 펼친다는 뜻이니 어찌 부처의 심중이 아니라 할 것인가. 그 뜻을 펼친 이가 설씨부인이었다. 
 광덕산이 그 마음을 모아 흘려보내는 물을 옥천(玉泉)이라 하였다. 성스러운 물이라는 뜻이고 강천(剛泉)이 또한 같은 의미이다. 모두 부처를 비유하는 귀한 말이다. 순창을 예전에 옥천골이라 하였는데 이곳은 실상 사람의 세상이 아니었다. 부처의 계시를 담은 신주단지처럼 옴팍스러운 첩첩한 산중이었으며, 여신들의 고향이었다. 그 여신이 훗날 보살로 현신한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 보살은 남산대(南山坮)에서 났다. 남산대는 강천산이 내려와 지금은 경천이라 불리는 옥천에 발을 담그고 있는 그 발등과 같은 곳이다. 한가하고 여유롭게 천천히 내려와 자리 잡은 모습이 마치 순창 사람들의 살림살이를 엿보듯이 하고 있다. 그 낮은 산자락 남쪽 햇살 밝은 중턱에서 우리의 새로운 역사가 준비되고 있었다. 순창 설씨는 설자승이 1126년 아내의 고향인 순창으로 낙향하면서 토종성씨로 자리 잡았다 했다. 이 내력은 훗날 신말주(申末舟)가 부인 설씨를 따라 남산대에 자리를 틀면서 신씨가 문중을 이루었던 것과 같다. 이는 순창이 여신들의 땅이었음을 엿보이는 것이기도 하다. 어찌되었거나 설씨 부인(薛氏夫人 1429~1508)은 설자승 이후 300여년의 기도와 기다림을 통해 얻어낸 역사라 할만 했다. 아마도 광덕산의 은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남편 신말주가 대사간 벼슬을 하였기에 설씨부인도 상응한 교양을 지녔을 것으로 이해되지만, 실제로 그녀는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였고 글 읽기를 좋아하였다 한다. 무엇보다 성품이 부드러웠고, 문장과 서화에 뛰어났었다. 그리고 그녀는 부처의 마음을 권선문첩(勸善文帖)에 담았다.

 < 어느 볕이 밝은 봄날 그녀는 꿈을 꾸었다. 작고하신 어머니 형씨가 하얀 모자를 쓰고 구름 옷자락을 날리며 허공에서 내려와 나를 향하여 앉아 조용히 말씀하시기를 “내일 어떤 사람이 와서 선한 사업을 함께 하자고 청할 것이니 모름지기 마음으로 즐겁게 따르고 게을리 하는 뜻을 갖지 말라. 이것이 너의 복을 짓는 원인이 되리라.” 하였다. 갑자기 꿈에 어머니가 오신 것도 그러하거니와 꿈이 하도 생생하여 기이하다는 생각으로 잠을 마저 끝내지 못하고 새벽을 기다렸다. 그러고 이른 아침이 되어 사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있어 사람을 시켜 나가보니 평소 가까이서 잘 알고 지내는 약비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오래전에 광덕산 좋은 자리에 ‘신령(信靈)’이라는 중이 초사(草舍)를 지어 부처님을 모신 이후 이곳에 다시 여러 불자들이 돈을 모아 사찰을 중창할 때 함께했던 약비라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이름을 부도암이라 하였는데 규모는 작아도 도량이 청정함이 뛰어났었다. 그러나 다시 건물이 퇴락하고 기울어 이를 개축코자 하였으나 어려움이 컸다. 그가 말하길 “듣자오니 부인께서 이런 일을 좋아하신다 하는데 여기에 시주를 허락하시려는지요.”라고 묻는 것이었다. 이때 나는 어젯밤 꿈이 상기되면서 대체 이런 기험한 일이 또 있겠는가. 돌아가신 어머님께서 생시에 영명(英明)한 자질이 있어 온갖 착한 일만을 하고 악한 일은 일체 하지 않았으니 필시 하늘의 존귀한 자리에 계시면서 미래의 운수까지 소명하게 알아서 나에게 이 선업을 알려 주는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일은 내가 즐거워하는 바인데 하물며 어머님이 명하는 것을 거역하겠는가. 내가 이 일에 주간이 되어 하나의 원당을 짓는 것이 마땅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제 들으니 이 암자의 작은 규모로 보아 이에 소요되는 재정이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니 나 혼자만의 재력으로 담당하기가 어려우리요마는, 이런 일을 하는 데는 천만인이 기도를 같이 함으로써 뒤에 복된 업인을 맺게 하는 것이 옳다 >고 생각하여 그 내용을 적고 옆에 부도암을 그려 널리 돌려보게 하였다.
 그녀의 평소의 심성을 엿보는데 부족함이 없는 모습이다. 일상적으로 이웃을 아우르고 주변을 살피는 삶이었을 텐데도 굳이 꿈에서까지 어머니의 부탁이 있었던 일도 예사롭지 않은 것이지만, 그 뜻을 널리 알려 많은 이들에게 부처의 공덕을 얻도록 한 마음이 넓다. 이미 어머니는 부처가 되었고, 그녀는 보살이 되었음이다.  
 이 작은 그림이 우리 역사를 기록할 것이라고 어찌 상상이나 하였을까. 이 부도암도는 지금까지 알려진 가장 오래된 우리나라 여성이 그린 작품으로 남아있다. 이 글과 그림은 1482년에 제작된 권선문첩 속에 담겨져 지금은 보물 제728호로 보호되고 있다. 수묵으로 그리고 채색을 올린 그림의 수준이 뛰어나고 또한 당대 유행했던 화풍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어 그 의미가 더욱 크다.
 언제나 부처의 마음은 이렇듯 조용하게 그리고 매우 낮고 작은 곳에서 이루어지는 것 같다. 아마도 설씨부인의 행적은 이러한 부처의 속 깊은 뜻이 이 땅에서 오랫동안 준비되어진 모습인 것이 분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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