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성정 이담손 고가(이웅재 고가)는 조선중기의 건축양식을 간직한 왕실가문의 집으로 이곳은 뒤로 낮은 산이 길게 뻗어 있고 앞으로는 섬진강 지류가 흘러 명당으로 손꼽히는 곳이다. 마을 앞으로 넓은 들판이 있어 사람이 살기에도 좋은 조건을 갖춰 백제시대부터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또한 교통의 요충지로서 아랫마을에는 백제산성이 있고 내륙에 속하는 이곳은 임실과 장수·남원·순창의 한가운데에 위치한 지정학적 요충지여서 1439년에서부터 1700년까지 261년간 오수찰방이 있어 11개 역을 관할하기도 하였던 곳이다.

 

이처럼 길지이다 보니 대대로 권문세가들이 집성촌을 이루었다. 고려 때에는 진주하씨, 남원양씨, 홍성장씨가 입향入鄕을 하여 살았고 조선초기에는 순천김씨가 삭녕 최씨가 다음에는 전주이씨가 이곳에 터를 잡았다. 따라서 이곳에 입향한 이담손李聃孫은 세종대왕의 형님이신 효령대군孝寧大君의 증손 춘성정春城正이시며 순천김씨를 처가로 두기도 하였다.

 

한국학 중앙연구원의 인물사전에 따르면 이담손은 효령대군 이보李補의 손자인 고림군 이훈李薰의 아들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담손이 이 마을에 입향 하게 된 것은 연산군 때 일어난 갑자사화甲子士禍 때문이었다. 당시 사화가 일어나 주계군朱溪君 이심원李深源 등 왕실종친들이 처형을 당하자 화를 피해 이곳 둔덕리에 내려와 정착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후 임금에 오른 중종이 전국에 방을 붙여 지방으로 몸을 피한 왕실종친의 소재를 찾았고 그때 춘성정이 이곳에 거처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되어 관찰사가 직접 그를 모시고 대궐로 올라갔다고 한다. 임금이 한양에 올라와 살 것을 종용했으나 그는 지방에서 후학을 가르치겠다고 하며 올라가지 않겠다고 하자 이곳에 집을 지어 주도록 어명을 내렸다고 한다.

 

춘성정이 이곳에 내려온 이후 왕족의 일원으로서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마다 몸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현재의 집 주인이자 이담손의 17대 종손인 이정평李廷坪씨에 따르면 임진왜란 때 춘성정의 손자인 이대윤李大胤부자가 함께 의병활동을 한 것은 물론 당시 의병장이었던 고경명高敬命에게도 활동하는데 지원을 했다고 한다.

 

또한 그의 후손들이 병자호란때에는 독전관으로 참전했고 일제강점기 3·1운동에도 전주이씨 가문에서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여 항일운동을 함으로서 이때 민족대표 33인 못지않은 활동을 했다고 한다. 특히 집안의 이기송 선생은 1919년 3월 23일 800여명을 오수시장에 모이게 하고 만세운동을 직접지휘함으로서 7년형을 받기도 하였다. 만세운동이 이어지는 과정에 이정평씨 아버지인 고 이웅재李雄宰는 학생시절 항일활동을 하다 서울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고 한다.

 

이담손이 낙향하여 자리 잡은 곳 둔덕리의 고가古家는 어명御命에 의해 왕족이 살 수 있도록 특별하게 지어진 집이다. 그런 만큼 공간 구성에서 일반 사대부집과는 다른 독특한 건축양식이 여러 곳에 남아 있다. 이 집을 지은 때가 1500년대이니 500년이 넘은 집이다. 다만 그간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쳐 보존되고 있는 고가이다.

집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들어서면 웅장한 솟을 대문이 있는데 한눈에 보아도 여느 사대부집안의 솟을 대문과는 달리 높이 솟아 있다. 솟을 대문 위에는 임금이 내린 효자정려와 현판이 걸려 있었지만 최근 현판이 떨어져 정려만 남아 있다.

1870년 고종이 내려준 정려에는 유명조선효자증통정대부이조참의이문주지려有明朝鮮孝子贈通政大夫吏曹參議李文?之閭라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대문채도 아마 그때 중수된 것으로 보인다. 떨어진 현판은 보수 때 다시 걸기 위해 집안에 보관해 두고 있다.

 

이 집의 솟을 대문에는 어느 집과 다른 작은 문이 별도로 나 있는 점이 특이하다. 이 문은 일반인들이 출입하도록 만든 문이라고 한다. 즉 높은 솟을 대문은 임금이나 왕족 등 귀한 손님이 행차 할 때 이용했다는 것이다. 대문채 앞에는 말을 타고 내릴 수 있는 하마석이 양쪽에 놓여 있고 대문채 안쪽으로는 마굿간이 있다.

대문을 들어서면 안 행랑채와 함께 오른쪽으로 사랑채가 눈에 들어온다. 정면4칸 측면1칸 규모의 사랑채는 크지는 않지만 높은 기단 위에 앉아 있다. 사랑채를 오르는 계단도 높은 디딤돌을 이용해 만들었다. 문화재청의 기록에 따르면 사랑채 상량문에는 1864년에 건립된 것으로 나와 있다. 사랑채는 방과 널찍한 대청으로 이루어져 있다. 방 앞으로는 작은 퇴를 두고 난간을 둘렀다.

 

사랑채 옆으로 안채가 역시 높은 석축기단 위에 서 있다. 정면5칸 규모인 안채는 가운데 대청을 중심으로 양쪽에 날개 채를 달아내 전체적으로 ‘ㅠ’자 형태를 이루고 있다. 경사진 지형이어서 높은 기단위에 앉은 본채와 달리 양쪽날개채의 기단은 이보다 낮다. 이에 따라 날개채의 지붕도 본채의 지붕아래 단차를 두고 낮게 이어진다. 본채는 대청을 가운데 두고 안방과 도장방 및 마루방이 마주하고 있다. 도장방 아래로 마루방이 있고 건너 방은 그 아래에 위치한다. 안방 옆채 쪽으로는 부엌과 방이 이어진다. 그런데 여기에 특이한 공간이 하나 있다. 바로 방의 상부에 만든 공루가 있고 그 밑에는 아궁이를 두었다.

 

이 집에서 또 한 가지 눈에 띄는 것은 안채와 사랑채의 중문이 약간 꺾여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일반적인 사대부집안에서 볼 수 있는 형식이 아니다. 대개 사랑채에서 안채로 이어지는 중문은 사랑채 정면 쪽으로 만드는데 반해 이 집에서는 사랑채 뒤쪽과 연결된다.

즉 안채와 사랑채 사이의 중문을 나서면 사랑채 뒤쪽을 지나 사당으로 이어지게 되어 있다.

이는 이 집의 바깥 중문의 위치와도 무관하지 않은 듯 하다. 바깥 중문은 사랑채 쪽에 비교적 넓게 설치되어 있다. 대문에서 집으로 들어 올 경우에는 사랑채를 빙 돌아 안채로 들어가야 하지만 바깥 중문을 이용하면 곧바로 사랑채 뒤쪽에서 안채로 연결된다. 즉 집을 자주 드나드는 이들이나 일반적인 출입은 중문을 이용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인다.

 

건물들이 엇각으로 이루어지며 높낮이도 달라 안채 앞과 옆으로는 안 행랑채가 안채를 감싸는 형태로 서 있다. 부엌이 있는 뒤쪽으로 장독대와 우물이 있고, 그 옆에 방앗간과 화장실 건물이 들어 서 있다. 그리고 사이를 두고 광과 방, 그리고 사방이 터진 높은 마루가 설치되어 있는데 마루 밑으로는 아궁이가 있다. 그리고 아궁이에서 안마당으로 드나들 수 있는 낮은 문이 있다.

 

방앗간이 있는 건물과 광이 있는 안 행랑채의 사이를 띄어놓은 것은 아마도 이 집의 바람방향과도 관련이 있는 듯 하다. 즉 집의 안채가 남향을 하고 있어 바람 길을 막지 않기 위한 배려로 보인다. 이 바람 길은 안채 날개 채 끝에 만들어 놓은 공루와도 관련이 있다.

이정평씨의 설명에 따르면 이 공루는 예전에 시신을 보관해 두었던 장소라고 한다. 즉 시신이 쉬 부패하지 않도록 시원한 바람 길을 열어둘 필요가 있었던 셈이다. 실제로 건물 사이에 일각문 등 아무런 출입 장치를 해 놓지 않은 것을 보아도 이를 알 수 있다.

 

안 행랑채에서 안채의 날개로 이어지는 공간은 다소 복잡하게 이루어져 있다. 우선 사랑채와 안채 사이의 중문 옆 안채의 날개 아래로 이어지는 곳에 사랑방의 아궁이를 두었고 사랑채와 안 행랑채의 구분을 위해 낮은 사이 담을 설치했다. 사이 담 옆으로도 공간들이 나뉘어 있다. 이 역시 사대부집안에서는 찾기 어려운 구조다. 안채와 사랑채, 안 행랑채 등이 연결되는 부분에서 공간구조가 복잡하게 얽힌 데는 각 채의 건물 배치가 일정하게 정돈되어 있지 않고 각 건물이 서로 조금씩 틀어 앉으면서 엇각으로 배치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마도 이는 이 집의 지형 및 지세에 따라 집을 앉히면서 생긴 문제가 아닌가 보인다.

 

집 뒤로는 울창한 나무들 사이로 사당 채가 자리 잡고 있다. 사랑채 옆으로 돌아 오르게 되어 있는 사당 채는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있다. 이 집 역시 사당 공간과 안채, 사랑채로 이어지는 공간의 위계질서에 맞추어 지은 집이라 할 수 있다. 사당 정면에는 ‘춘성정사春城正司’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대가 집 임에도 규모가 그리 크지 않고 사대부집안의 경우 팔작지붕이 일반적인데 비해 사랑채나 안채나 모두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는 점도 눈에 띈다. 이는 조선초기에서 중기에 이르는 시기의 건축양식이다. 즉 이 집을 처음 지을 당시인 1500년대의 건축양식을 보존해 온 것으로 볼 수 있다.

 

본 집의 소유자인 이정평씨의 설명에는 이곳은 배산임수의 명당 터라고 한다. 또한 왕실가문의 집답게 출입문도 남쪽의 솟을 대문을 비롯해 각 방위별로 4개의 문이 있었다고 하는데 서쪽의 문은 남아 있지 않는다고 한다. 집의 전체적인 규모도 지금보다 더 컸다고 하는데 안채와 사랑채 지붕에는 왕실가문임을 뜻하는 황금막새기와가 아래를 굽어보고 있다.

이 집은 1977년 12월 31일 전라북도 민속자료 12호로 문화재로 지정되어 보존해 오고 있으며 창덕궁에 민간건축인 연경당이 있다면 이 집은 민간에 나와 있는 조선 중기 왕실 건축의 한 단면을 보여줄 수 있는 건물이라는 점에서 문화재적 가치가 크다고 한다. /임실=임은두기자 · led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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