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사람들은 자신의 이름 앞에 별칭을 붙이는 걸 좋아했다. 이름은 실체이고 별명은 상징이라 생각했을 터이다. 오래된 옛 사람들만은 아니다. 아직도 그 관행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을 보면 그 상징어로서 자신을 대변하고 싶어 하는 심리는 매우 깊은 듯하다. 그 관행은 매우 오래된 것이어서 때로 그 별칭이 실제보다 더 이미지화 되어있는 모습을 보게 되기도 한다. 시인 최승범이 그를 야린(野麟)이라 했다한다. 그가 고향 전라도 땅에 처음으로 조각을 가져온 야린 배형식(裴亨植926-2002)이었다.
 조각(彫刻)이란 나무나 돌 등을 깎아서 어떤 조형물을 만드는 것을 말한다. 조형물을 만드는 방법으로는 조각처럼 깎아서 만들기도 하고 또한 붙여가며 만들기도 한다. 흙 등을 붙여가며 만드는 방식을 조소(彫塑)라고 하지만 대부분의 조각가들은 이 두 방식을 같이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배형식도 그러했다. 물론 우리 미술에서 조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대표적으로 화강석을 깎아 만들었던 석불(石佛)이나 목불(木佛) 그리고 탑 등과 함께 흙을 붙여 만들었던 소조불상들도 있다. 그렇더라도 조각이라는 근대적 개념을 통해 감상을 위한 순수 조형물을 만들었던 역사는 오래되지 못한다. 실제로 근대적 조각가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한다. 야린 배형식의 존재는 그래서 중요하다.
 

야린은 야생(野生) 즉 분방하고 자유로운 삶을 사는 기린을 일컫는 것인데, 배형식이 꼭 그러했다. 평생 몸 매무새가 아득한 초원의 기린처럼 매끄러웠고 눈망울은 맑은 하늘의 구름을 처다 보듯 초롱초롱하였다. 무엇보다 훤칠한 키에 시원시원한 목덜미의 생김새가 그와 같았다. 언제나 비싸지 않은 술잔과 함께하며 욕심 없었던 초연한 삶이 기린의 모습이었다. 아마도 덕유산 아래 무주에서 얻은 성품일 것이다. 비록 중학교 진학을 위해 일찍 떠났지만 고향 무주에서 얻어낸 평생의 지표가 그러했을 터이다.
 그가 어떤 연유로 어린 시절 동광미술연구소에 들어가 그림을 시작하였는지 생전에 물어보지 못한 일이 몹시 안타까웠다. 생전에 그와 함께 고사동 옛 동광미술연구소 터를 찾았을 때 감회와 흥분으로 가득했던 야생의 기린을 보았다. 당시 한국에서는 동광미술연구소와 같은 크고 정돈된 곳은 없었다고 했다. 그는 2년여 동안 동광미술연구소에서 유화나 수채화 등을 비롯해 동양화도 공부했다고 전해지지만, 아마도 그는 일찍부터 집안에서 동양화에 상당한 수련을 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는 문인화가로 활동했던 할아버지 배석린을 비롯해 고모 배정례가 역시 동양화가였던 집안에서 그림을 익혔었다. 그런 후 동광미술연구소에서 신미술에 눈을 떴을 터이다. 그렇더라도 그가 조각의 길을 갔던 것은 매우 이례적인 사건이었음에 틀림없다. 당시 전주에서는 조각이라는 영역에 대해 이해를 얻었을 가능성이 없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배형식은 동광미술연구소에서 그림을 공부하다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조각과가 창설되어 첫입학생으로 진학했다. 당시 그의 고향 전라도에서는 사실 이름은 있었으나 실체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조각이었다. 그 말은 즉 전라도에 조각가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어떤 연유에서 그가 조각을 공부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당시로서는 새로운 도전이고 모험이었음에 틀림없었다. 그 사건에서 아무도 그를 후원했던 사람은 없었던 듯하다. 그는 경제적 어려움으로 8년 만에 대학을 졸업했다 한다. 참으로 어려운 시간이었다. 학비와 생활비 마련을 위해 소위 이발소 그림을 그려 팔았다 한다. 동양화로 그린 “백마강 낙화암”도는 눈을 감고도 그릴 수 있었다는 그의 회고를 통해서 그의 동양화 실력이 적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재학 중이던 1956년 대한민국 미술전람회에서 부통령상을 수상하고 본격적인 조각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서울에 머물다 1961년에 조각가라는 낯선 이름을 달고 고향 전주에 정착했다. 그러다 원광대학교 미술대학이 설립되면서 본격적으로  조각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의 조각은 정직했고 순수하였다. 보이는 것을 보이는 그대로 조형했고 조금이라도 요령을 더하지 않았다. 특히 조각의 정석으로 인식되어왔던 인체의 아름다움에 정성을 다하였다. 그래서 우리 조각의 모델을 갖추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조각이라는 이름을 갖고 한국 땅에 맨 처음 들어온 것이 인체였다. 그래서 아마도 그는 평생을 인체를 통한 사실조각에 매달렸을 것으로 보인다. 사명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를 일이나 한편으로는 참으로 고지식한 측면이 없지도 않았다. 그가 평생을 통해 한발치도 사실적 인체조각에서 벗어나지 않았던 모습에서 읽혀진다. 어쩌면 그는 누군가는 한사람이라도 이 조각의 교본을 간직해야 한다고 굳게 믿었을지 모른다. 그리고 그 일이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이라고 믿었던 것 같다. 그가 야린 배형식이었고 그것은 어쩌면 어린 시절에 물려받은 고향 덕유의 마음이었을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그가 살았던 현대라는 시류에 흔들리지 않았던 충실한 삶의 태도는 분명 무주 덕유산에서 얻은 것이 틀림없었다. 그가 굳이 조각으로 이름을 얻지 않으려 했던 태도 그리고 평생을 그의 고향에 조각을 심고자 노력했던 자세는 참으로 귀한 것이었다. 그 일은 마치 야생의 초원을 성큼성큼 걸어가는 기린의 발걸음과 같은 것이었을 터이다. 가족으로부터 외면 받았던 조각, 세상으로부터 이해되지 못했던 조각의 길을 걷는 일이 꼭 그와 같았다. 초원이라 하나 날카로운 가시덤불이 가득하고 때로는 건조하기 짝이 없는 불모지 같은 곳이었다. 그 길을 야린이 걸었다. 
 그는 작품으로 이름을 내지 않았다. 많은 작가들이 흔하게 하는 작품전도 갖지 않았다. 사람이 좋았고, 더불어 술이 항상 그를 따뜻하게 하였다. 그런 그가 딱 한번 개인전을 열었었다. 그것도 한사코 말렸으나 제자들이 열어준 퇴임기념전이었다. 그는 사실 이미 조각가였으니 전시가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그의 성품은 분명 어린 시절 덕유산을 품었던 그 모습이었다. 그렇더라도 그의 모습은 사실 많은 제자 조각가들 속에서 비쳐지고 있다. 야린이 전북 땅에 조각의 역사를 시작한 이래 조각은 이제 우리 환경에서 가장 가치 있는 조형물이 되었다. 이제 다시 그의 삶이 새롭게 보이는 시기가 된 듯하다. 비록 그는 창조적 조각가는 아니었을지라도 그의 고향에 조각의 교과서를 펼쳤던 인물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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