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전북 백제 후백제 재발견
1-프롤로그
찬란한 문화유산을 꽃피웠던 백제. 백제역사유적지구가 지난 2015년 7월 유네스코(UNESCO)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이후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특히 충남 공주와 부여에 가려 과소평가되고 평가절하 되었던 전라북도내 백제 유적의 가치가 재평가되고 있다. 왕궁리 유적과 미륵사지 등 도내에 있는 유적의 등재가 도민들의 정체성 확립과 자긍심 고취, 백제사 연구 외연 확대 등을 촉진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최근 백제사에서 전북이 차지하는 위상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 지고 있다. 그동안 백제 왕도(王都)가 서울 지역과 공주, 부여라는 연구에 밀렸던 전북이지만 익산 왕궁리 유적이 왕궁으로 공인받으면서 전북은 백제의 변방이 아니라 중심이었다는 사실이 하나, 둘 밝혀지고 있다.
익산은 백제 이전부터 유서 깊은 지역이다. 청동기 문명을 기반으로 한 고조선 준왕이 남쪽으로 내려와 나라를 세운 곳이 익산으로 삼한의 맹주인 마한 목지국의 소재지이기 때문이다. 백제 근초고왕이 마한에 대한 정복전을 개시하기 전 백제의 영역은 <삼국사기> 시조왕 13년조에 따르면 북으로는 예성강, 서쪽으로는 서해, 동쪽으로는 주양(춘천)에 이르렀으며 남쪽은 웅천으로 기록돼 있다. 여기서 웅천은 바로 금강이다. 당시 마한 목지국왕은 백제의 웅천책(熊川柵) 설치에 대해 배은망덕한 일이라고 책망했다는 기록이 있다. 금강 이남인 익산에 목지국이 있었다는 증거인 셈이다.
<제왕운기> <고려사> 등에 의하면 고려시대 이래로 익산 금마는 마한의 거점으로 여겨졌다. 다산 정약용은 <삼국사기>를 토대로 ‘마한은 지금의 익산이다. 총왕(總王-마한의 진왕)이 도읍한 곳이 바로 이곳이다.…한사(漢史)에서 목지국이라고 한 것은 바로 익산을 가리킨다.…당시에 마한 땅이 가장 넓어 북쪽으로는 웅진으로부터 남쪽으로는 바닷가에 닿았다’고 갈파한 바 있다.
백제가 마한을 정복했다는 사실은 영토가 크게 확장됐음을 의미한다. <일본서기>에는 백제가 마한을 멸망시키고 복속한 지명이 나와 있다. 현재 부안과 부안군의 보안, 김제, 정읍과 고부가 자연 항복하였고 주류성에서 근초고왕과 왜군이 회동해 기쁨을 나누었다고 기록돼 있다. 이들 지역은 모두 금강 이남부터 노령산맥 이북지역으로 마한을 멸망시키기 이전 백제의 남쪽 경계는 마한의 북단 경계와 맞닿아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가운데 고부에는 고사부리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고부는 서기 538년 이후 시작된 사비성 도읍기에 중방성(中方城)이 설치된 곳이다. 중방은 5방 가운데 백제 영역의 중심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당시 백제는 고부를 국토의 중심으로 인식했던 것으로 적어도 노령산맥 이북의 전북 지역은 백제의 변방이 아니라 중심으로 여겨졌다는 증거다.
이후 전북 익산은 백제의 왕도가 된다. 무왕 때 일이다. ‘백제 왕도로서 익산’을 강조하는 이도학 한국전통문화대학교 문화유적학과 교수가 지난해 8월 ‘전라북도 백제를 다시 본다’ 세미나에서 발표한 내용이다.
“백제사 속의 익산에 대해서는 별도(別都)·행궁(行宮)·신도(神都) 등등의 설이 제기되었다. 오랜 논쟁의 중심에 섰던 익산의 왕궁리 유적은 王宮으로 결론이 났다. 왕궁평성은 2015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기까지 했다. 이와 관련해 오랫동안 미혹(迷惑)시켰던 천도계획설 즉 ‘미완의 왕도설’은 역시 허구가 들통이 났다. 이 견해대로라면 왕궁평성은 왕궁이 될 뻔하다가 못 되었으므로 일종의 공동 상태로 남겨져야 한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일상에서 사용했던 가장 격이 높은 유물들이 남아 있다.…왕궁평성 안에서 출토된 중국제 백자와 청자를 비롯한 수입 진귀품은 누가 사용했다는 것인가? 유리제품과 금사와 같은 최고급품을 사용하는 이들이 거처했던 공간은 왕과 왕족을 제외하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문헌과 고고물증을 통해 검증해 본 결과 왕도가 분명하며 사비도성의 서도(西都)와 왕궁평성의 동도(東都)라는 2개의 도성 체제임을 필자가 최초로 밝혔다.”
서기 660년 백제는 나당 연합군에 의해 멸망한다. 이후 나당연합군의 횡포를 못견딘 유민들은 백제 부흥 운동을 일으킨다. 661년 부흥군은 주류성을 거점으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하지만 내부 분열로 말미암아 663년 부흥운동의 거점이었던 주류성을 신라군에 잃고 만다. 백제 부훙군의 중심지 주류성은 충남 홍성, 연기설 등이 있지만 현재 부안의 우금산성이라는 주장이 더 설득력이 있다. ‘주류성=우금산성’은 안재홍, 노도양 등 많은 학자에 의해 확고한 학설로 자리 잡았다. 손보태도 <조선민족사 개론>(1948년)에서 주류성함락의 시작인 ‘백강전투’의 백강을 우금산성 인근의 동진강으로 비정했다.
신라는 삼국 통일을 달성한 이후, 중앙 집권의 강화를 목적으로 지방 행정 조직 ‘9주 5소경’을 만든다. 이 가운데 5소경은 ‘5개의 작은 수도’라는 뜻으로 백제의 옛 땅 남원에 소경을 설치한다. 남원에는 백제와 가야 문화 외에 신라와 고구려 문화까지 녹아 있었다. 또 교통의 요지였을 뿐 아니라 고대국가의 국력의 척도가 되는 철광산지를 끼고 있었다. 이 때문에 남원에 소경이 설치됐으며 이런 남원경의 기반은 후백제가 전주로 천도한 요인 가운데 하나였다.
889년 광주를 군사력으로 점령한 견훤은 서기 900년 전주로 천도하면서 국호를 ‘후백제’라 칭한다. 견훤이 전주로 천도한 이유는 백제에 대한 귀속 의식 때문이다. 광주지역 보다 한 세기 이상 먼저 백제에 포함된 전주가 백제 재건에 대한 응집력이 더 강했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살펴봤듯이 전북은 마한 목지국(익산), 백제의 왕도(익산), 백제 부흥운동의 거점(주류성), 후백제의 왕도(전주)가 있던 지역이다. 더 이상이 전북이 백제의 변방으로 치부돼서는 안 되는 이유다. 이제는 이를 바탕으로 백제 문화권 중심지로서의 위상을 확보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본지는 이를 위해 ‘전북이 백제의 중심’임을 증명하는 역사적 자산을 살펴보고 전북의 문화 자긍심을 이어가는 기획시리즈를 오늘부터 20회에 걸쳐 매주 1회 싣는다.
/특별취재반

■ 글 싣는 순서
1. 프롤로그
2. 마한
3. 익산 입점리 고분군
4. 정읍사
5. 고사부리성
6. 장수 가야
7. 남원 운봉 원산리 가야 고분군
8. 익산 왕궁리 유적(상)
9. 익산 왕궁리 유적(하)(
10. 벽골제
11. 미륵사지(상)
12. 미륵사지(하)
13. 주류성
14. 피성
15. 백강전투(상)
16. 백강전투(하)
17. 후백제 왕국의 웅도 전주
18. 전주 동고산성
19. 금산사
20. 에필로그

■ 특별취재반
취재:이병재, 최병호, 이수화 
사진:장태엽, 유경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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