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이란 우리에게 어떤 존재로 해석되는가. 물은 우리 신체의 70%를 차지하고 있으며 마시는 음용수로서의 역할 뿐만 아니라 인간 삶의 근본을 지배하는 불질로 그 중요성은 예전부터 부각돼 왔다.
구석기시대의 불과 석기 사용이 인간으로서 삶의 시작이었다면 신석기 시대에 들어와 새로운 창조물인 토기의 사용과 더불어 농경의 시작은 진정 인간다운 삶을 향한 위대한 진보였다.
청동기 시대를 거쳐 고대~중세로 이어지면서 물 관리, 즉 ‘치수’는 지역집단 뿐만 아니라 국가의 존망이 걸린 중요한 사업이 되었다.
이중에 한반도 거주민들의 주요 식량원 이었던 쌀을 수확하는 벼농사는 치수사업이 뒷받침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당초 벼농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청동기 시대의 물관리는 그저 조그만 하천에 보를 만들어 물길을 관리하는 소규모 사업였다. 하지만 고대국가가 형성될 무렵부터는 대규모의 벼농사를 지으면서 많은 물을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저수지가 필요하게 됐다.
331년 백제시대에 축조됐다고 전해지는 김제 벽골제가 이러한 대규모 저수지의 출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수록돼 있는 김제 벽골제는 백제 땅이었던 벽골현에 백제 비류왕 27년(331년)에 축조된 것으로 전해진다.
백제 초기는 지방 집권력이 미약했던 시기였다. 그 당시 지배계층은 중앙집권력의 강화를 위해 농업생산력을 증대시키는게 필요했고 이런 필요성에서 대규모 저수지인 벽골제가 탄생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태어난 벽골제는 우리나라 최대의 고대 저수지이자, 제천 의림지, 밀양 수산제와 더불어 삼한 시대 3대 수리 시설로 꼽힌다.
벽골제는 제방을 쌓는데만 연인원 32만여명이 동원된 것으로 추산되며 이밖에 수문 및 하천 공사 등을 헤아릴 때 공사인원은 훨씬 증가한다. 당시 사회규모와 인구수 등을 고려하여 생각한다면 벽골제의 축조 유지 수축공사가 얼마나 거대한 국가단위 사업이었는지를 짐작케 한다.

김제를 설명할 때 사용하는 대표적인 표현이 ‘징게 맹경 외에밋들’이다. ‘징게 맹경’은 김제와 만경을, ‘외에밋들’은 넓은 들녘을 말한다. 지금도 김제평야와 만경평야는 우리나라 최대의 평야인 호남평야를 이루고 있다. 당시 벽골제는 백제 벼농사의 중심지였던 호남평야에 물을 대기 위해 조성한 저수지였던 것이다.

벽골이란 명칭은 김제의 백제 때 지명인 볏골을 한자로 옮겨 적은 것이다. 그후 신라 원성왕 6년(790)에 증축되었고 고려 현종 및 인종 때와 조선 태종 15년(1415)에도 개축되었다. 임진왜란 때 관리·유지가 전폐된 이래 주변의 농민들이 헐어서 경작지로 사용하기도 했다. 특히 1925년 일제의 동진농지개량조합에서 이 둑을 농지 관개용 간선 수로로 개조하여, 둑의 폭을 종단하고 그 가운데로 수로를 만들어 농업용수를 흐르게 함으로써 원형이 크게 손상되었다.

현재 김제 벽골제는 사적 제 111호로 지정돼 있다.
제방은 포교리를 기점으로 월승리까지 남북으로 일직선을 이루어 약 3km의 거리에 남아 있는데, 수문지임을 알려주는 거대한 석주가 3군데에 1쌍씩 있다. 그리고 1925년 간선수로로 이용하기 위한 공사에서 원형이 크게 손상되었으며, 제방은 절단되어 양분된 중앙을 수로로 만들어 농업용수를 흐르게 하였다.
1975년 발굴·조사에 따르면, 둑의 높이는 북단이 4.3m, 남단이 3.3m이며 원래는 다섯 개의 수문(수여거, 장생거, 중심거, 경장거, 유통)을 통해 김만평야 일대에 물을 대었다. 지금은 남쪽 끝의 수문인 경장거와 북쪽 끝의 수문인 장생거, 그리고 중앙 수문인 중심거 자리에 거대한 돌기둥들이 남아 있고 수문 등이 복원되었다.
원래 수문은 길이 5.5m의 돌기둥을 4.2m 간격으로 세우고 두 기둥의 안쪽에 너비 20㎝, 깊이 12㎝의 홈을 판 후 느티나무 판을 가로질러서 안팎에 고리와 쇠줄을 달아 아래위로 들었다 놓았다 하며 방수량을 조절하도록 되어 있었다. 또 수문 바깥의 방수로 양편에 장방형으로 가공된 돌로 석축을 쌓고 바닥에는 커다랗고 편편한 돌을 깔아 쏟아져 나오는 물의 압력을 견디도록 되어 있었다.
일제에 의해 벽골제가 헐리면서 현재는 긴 제방과 그 옛날 수문 자리에 세워졌던 돌기둥만 남아있다.
둑의 북쪽 기점인 포교리에는 조선 태종 때의 벽골제 중수와 관련된 벽골제 중수비가 있다. 비문이 마모되어 알아볼 수 없지만, 번역해놓은 동판 안내문이 옆에 있어 그 내용을 살필 수 있다.
태종 때의 수리공사는 장정 1만 명에 사무직 300명이 동원된 대규모 공사였다.
그 공사의 규모를 말해주듯, 포교리에는 ‘신털뫼‘와 ’되배미‘가 남아 있다. 신털뫼는 벽골제 공사에 동원되었던 일꾼들이 신에 묻은 흙을 털거나 낡은 짚신을 버린 것이 쌓여 언덕을 이룬 곳이며, 되배미는 수많은 일꾼을 일일이 셀 수가 없어서 500명이 들어갈 수 있는 논을 만들어 한꺼번에 500명씩 세었다는 이야기가 얽힌 논이다.
위에 언급한 것과 같이 벽골제는 축조된 이래 790년과 1143년, 1415년에 수리 보강이 거듭되면서 1925년까지 약 1600년동안 이 지역의 농업용수원으로서의 기능을 다해왔다.

 

(별도 박스) 별골제내 쌍용의 의미는
현재 벽골제는 관광단지로 조성돼는데 안으로 들어가면 거대한 용 조형물이 눈에 띈다. 높이 15m, 길이 54m에 달하는 두 마리 용이 마주 보는 모습은 벽골제의 규모에 걸맞게 위용을 드러낸다. 벽골제와 용은 어떤 관계일까.
전통 농경 사회에서는 왕이 물을 다스리는 능력이 중요했다. 이는 식량을 생산하는 중요한 요소이자, 국가 존속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벽골제는 물을 조절하는 국가적 수리 시설이고, 용은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존재로 곧잘 활용되었다. 이처럼 용은 벽골제와 생명인 물, 신화와 삶, 그리고 왕을 연결하는 상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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