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련하구나/완산의 아이/
아버지를 잃고/ 눈물만 흘리는구나/
일연은 삼국유사를 통해 후백제 비운의 영웅 '견훤'의 말년을 위 노래인 '완산요'로 표현한다.
한때 고려왕 왕건을 능가하는 강력한 세력을 형성했던 견훤은 935년 넷째아들 금강에게 왕위를 물려주려했지만 꽃을 시샘하는 찬바람이 몹시 불던 3월 다른 아들들에 의해 금산사 불당에 위리안치(집 둘레에 가시로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 가두어 둠)신세에 처하게 된다. '가엾은 완산 아이'라는 노래가 불린 것은 바로 이때였다.
이렇듯 금산사는 후백제를 세운 견훤이 지정한 원찰(자신의 소원을 빌거나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빌기 위해 특별히 건립하는 절)에서 자식들에 의해 3개월간 수모스런 감금을 당했던 사찰이다.

백제 법왕 원년(599)에 임금의 복을 비는 사찰로 처음 지어진 금산사는 신라 혜공왕 2년(766)에 진표율사에 의해 중창되면서 대가람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이때 진표율사는 미륵장륙상을 미륵전에 모셨고, 법당 남쪽 벽에는 미륵보살이 자기에게 계법을 주던 모습을 그렸다고 한다. 금산사에는 대웅전이 없고 미륵전에 있는 미륵불이 주불이다. 그때부터 금산사는 미륵신앙의 근본도량으로 추앙받게 된다. 높이 11.8m에 달하는 거대한 미륵보살을 모신 미륵전도 귀중한 불교 문화 유산으로 대접받는다. 우리 땅에서 유일한 3층 불교 건축물로, 국보 62호로 지정돼 있다.

미륵신앙은 미래의 부처인 미륵이 나타나 세상을 구원한다는 신앙이다. 사회가 혼란스러워질 때마다 사회 개혁을 원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다.
미래의 구원을 약속했던 미륵신앙은 우리 역사 속에서 사회변혁운동, 혁명사상과 결부되기도 한다. 대표적인 인물이 후고구려를 세운 궁예(?∼918)다. 말년에는 폭정을 일삼으며 비참한 최후를 마쳤지만, 살아있는 미륵을 자처한 궁예는 한때 대단한 지지세를 형성했다.?미륵신앙의 성지인 금산사 일대에도 정여립, 전봉준, 강증산 등 새로운 세상을 꿈꾸던 혁명가와 신흥종교 창시자들의 자취가 곳곳에 남아 있다. 모악산 입구의 금평저수지는 ‘오리알터’로도 불린다. 오리알터는 ‘올(來) 터’가 변해서 된 말이다. 그렇다면 누가 오는가. 바로 미륵부처다. 금산사에서 발현한 미륵사상이 이들이 혁명 정신을 잉태하는 데 작지 않은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녹두장군 전봉준(1854∼1895)도 오리알터 아래 감곡 황새마을에서 유년 시절 대부분을 보냈다. 훗날 그의 오른팔이 됐던 동학의 금구접주 김덕명과 태인접주 손화중도 바로 그 시절에 사귄 동무들이다. 전봉준은 이곳에서 ‘사람이 하늘’인 세상을 꿈꿨다.
갑오농민전쟁 실패 후 혼란기에 민중을 무서운 속도로 휘어잡은 증산교의 창시자 강증산(강일산·1871∼1909)은 금산사 미륵불을 공개적으로 차용하기도 했다. 강증산은 금산사 반대편의 대원사에서 49일 동안 기도한 끝에 도를 깨달았고, 오리알터 부근 구릿골 약방에서 도를 편다. 그래서 모악산은 증산교의 성지가 된다. 특히 강증산은 “내가 금산사로 들어가리니 나를 보고 싶으면 금산사 미륵전으로 오라”는 유언을 남기기도 했다.

금산사는 고려 혜덕(1038∼1096)왕사가 금산사 주지로 부임한 1079년 다시한번 부흥기를 맞게 된다. 개성 귀족의 아들로 법상종의 대종사가 된 그는 기존 금산사역을 넓히고 인근을 새로 개척해 3원 체제의 종합 대가람으로 발전시켰다. '대사구'라 일컫는 곳은 현재의 중심지였고, 광교원은 사역 남쪽에 경전 연구와 교육 시설로, 봉천원은 사역 동쪽 산록으로 승방 지구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각 원에는 3층 종각 건물들이 세워졌다고 전한다.

이후 1597년에 일어난 일본의 재침략인 정유재란으로 완전히 소실하기 전까지 금산사의 규모는 전각 23동, 당료 46동, 누각 및 기타 건물 24동과 대형 석물이 17점에 달하는 등 막대한 규모였다. 이후 1601년부터 35년에 걸쳐 전후 복원 공사를 시작해 현재 모습의 기틀을 잡았다.
3층의 미륵전은 재건을 완료했지만, 과거 대웅전과 약사전, 극락전을 합한 통합불전인 대적광전 한 동을 재건하는 데 그쳤다.
미륵전은 유일하게 현존하는 3층 목조건물로, 1635년에 중창된 이후 여러 차례 수리를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거대한 미륵입상을 모신 법당으로 미륵의 큰 자비와 용화수 아래의 설법을 뜻하는 의미에서 1층에는 '대자보전', 2층에는 '용화지회'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건물 안쪽은 3층 전체가 하나로 터진 통층이며, 3층 벽의 창호를 통해 은은히 들어오는 햇빛이 미륵삼존의 얼굴을 비추어 종교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1층과 2층은 앞면 5칸, 옆면 4칸이고, 3층은 3×2칸으로 1, 2층에 비해 규모가 줄어든다.

앞면 7칸의 대적광전은 이중기단 위에 길게 펼쳐진 건물로, 원래는 보물로 지정될 만큼 건축적 가치가 높았던 전각이지만 현존 건물은 1980년대 예기치 못한 화재로 전소돼 복원한 것이다.
미륵전의 반대편에 멀찍이 서 있는 대장전은 '사적기'에 '4면 3칸'으로 기록된 바와 같이 앞과 옆이 모두 3칸인 건물로, 1635년 중건되었으며, 이후 1922년에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다. 정면 가운데 칸에만 유일한 개구부가 나 있고, 팔작지붕의 용마루 위에는 뒤집어 놓은 밥그릇 모양형의 절병통이 놓여 있다. 예전에 삼층목탑이었던 것을 옮기면서 현재와 같아졌다는 설이 있지만, 평면 형태가 장방형인 점으로 보아 원래부터 대장전으로 세워지지 않았나 싶다. 용마루의 복발은 삼층목탑이 없어지면서 남은 흔적을 옮겨온 듯하다.

금산사의 현 건물들은 임진왜란 이후에 겨우 재건된 것들이며, 드넓은 마당을 가득 메웠던 수십 동의 전각들은 복원되지 못했다. 그러나 절 입구의 장대한 당간지주와 거대하고 화려한 석련대, 그리고 육각다층석탑 등 여기저기 남아 있는 유구들은 번성했던 과거의 흔적을 보여준다. 흑색 점판암으로 만든 육각다층석탑은 원래 봉천원 지구에 있던 것을 옮겨왔는데, 이 같은 형식의 소형 탑들은 고려시대에 큰 승방이나 암자 마당에 종종 세워진 것으로 알려졌다.

산중에 자리 잡은 다른 사찰과 달리 금산사는 한눈에 보기에도 넉넉히 너른 터를 가지고 있다.
지금 빈 터로만 남아있는 자리가 예전에는 절집들로 가득 차 있었을 것인데, 백제 법왕 때 처음 만들어지고 통일신라 경덕왕 때 크게 중수된 다음, 오랜 세월 동안 스러지고 세워지기를 되풀이했기에 이제는 옛 모습을 상상하기가 쉽지 않다.
초가을이 완연한 9월말, 금산사 단풍은 저절로 익어만 가는데 잊혀진 역사를 떠올리자니 붉거나 노란 색들이 그냥 그렇게만 보이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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