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근식 국민연금공단

그냥이라는 말이 좋다. 편안한 느낌으로 다가와서 좋다. 휴식처럼 느껴진다. 사전적으로는 특별한 이유도 목적도 없이 있는 그대로를 나타낸다는 의미이다. 어감 역시 좋다. 그냥이란 글자에서 마지막 ‘냥’에 유성음 ‘o’ 받침이 있어 발음을 하면 입속에 잠시 울림이 있다. 그 울림에서 여운이 느껴져 좋다.
 오랜만에 친구 전화를 받았다. 대학시절 함께 지낸 짝꿍이다. 40년 전 대학에 입학할 때부터 지금까지 인연 맺은 친구다. 무슨 일인가 싶었는데 잘 지내는지 궁금해서 그냥 한번 해 봤다고 한다. 그 친구는 잊을 만하면 전화를 한다. 친구가 그냥이라고 표현하는 그 마음이 좋다. 목적이나 평가 잣대 없이 다가와 주는 그 마음이 좋다. 멀리 인천에 있어 일 년에 한두 번 보는 것이 고작이지만, 먼 곳에서나마 늘 지켜봐 주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 것만으로도 입가에 미소가 생긴다. 나 역시 그 친구에게 그냥저냥 지내고 있다고 대답을 했다.
 어느 아동문학가가 쓴 ‘그냥’이란 동시가 떠오른다. 아이가 엄마에게 내가 왜 좋으냐고 묻자 엄마는 그냥이라 대답을 한다. 엄마가 아이에게 왜 엄마는 좋은지를 다시 묻는다. 아이 답변 역시 그냥이다. 짧은 동시지만 엄마와 아이의 관계처럼 그냥이란 단어에서 평화와 여유가 느껴진다. 
 첫사랑이 기억난다. 어린 시절부터 청년이 될 때까지, 메아리 없는 벽에 마음을 준 적이 있다. 내게 화를 내도 약속을 어겨도 싫은 내색을 해도, 단 한 번도 싫다는 감정을 가져본 적이 없다. 그런 순수한 첫사랑의 감정으로 지금까지 누군가를 사랑해 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내 삶에서 유일하게 순수한 사랑이었던 것 같다.
 누군가 왜 첫사랑을 사랑했냐고 묻는다면 ‘그냥’이란 동시에서 아이나 엄마처럼 나 역시 그냥이라고 대답을 할 것 같다. 어디가 좋고 무엇이 마음에 들어서가 아니었다. 이유 없이 언제나 마음을 내 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냥 좋았다. 살아보니 무엇이든 첫사랑의 느낌처럼 그냥 좋은 것이 가장 좋은 것이었던 것 같다.
 며칠 전, 고속도로를 질주하다가 간이 휴게소에 잠시 멈추었다. 이삿짐을 챙겨 가는 길이었다. 이번 인사이동으로 5년의 객지 생활을 마감하고 가족이 있는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나는 휴게소 벤치에 앉아 앞을 보았다.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차량과 시골 마을 보였다. 차 안에서 보는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질주하는 차량은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빠르게 달리고, 낯선 시골 마을의 정겨운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이란 문구가 떠올랐다. 4년 동안 같은 고속도로를 달렸는데 이곳 간이 휴게소에 앉아 쉬는 것도, 벤치에 앉아 여유롭게 즐기는 것도 처음이다. 간이 휴게소에서 나는 이유나 목적 없이 그냥 앉아 있었다.
 간이 휴게소 벤치에 앉아 고속도로 너머를 보았다. 겨울의 중턱이지만 시골 풍경이 아늑해 보인다. 옹기종기 규칙 없이 모여 있는 시골 마을이 저녁 햇살을 받아 평화롭다. 그 모습이 그냥이란 단어와 닮았다. 문득, 나는 타인이 나를 지켜보는 모습은 어떨까 하는 생각했다. 고즈넉한 시골 풍경으로 다가갈까 아니면 질주하는 자동차일까. 편함이 느껴지는 시골 풍경은 아닐 성싶다. 질주하는 자동차에 가까울 것 같다.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많이 부족했다. 가정에서는 10여 년 동안이나 주말부부로 지냈으니 가장의 역할은 부족했을 것이고, 직장에서는 비난을 감수하더라도 조직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가끔 탱크가 되기도 했으니 그리 편한 직장동료나 상사는 아니었을 것이다. 지나고 보니 다 부질없는 것인데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한 집착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차라리 욕심을 버리고 남들처럼 가정에서 아내와 아이들에게 더 충실했더라면 하는 미련도 든다.
 휴게소에서 ‘그냥’이란 의미를 새겨본다. 편안한 여유를 가지고 싶다. 달려가기보다 기다리고, 결과보다 과정을 소중히 여기고, 가지는 것보다 내어 주는 생활을 하고 싶다. 누군가 소극적이고 방임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냥이란 낱말처럼 버려두고 지켜보는 것이 삶의 여유일 수도 있을 테니. 나와 관련된 이들에게 이유도 목적도 없는 그냥이란 단어처럼 그냥 편하게 다가갔으면 하는 바람이 가지는 새해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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