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당의 길

오피니언l승인2021.06.16l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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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근식

나는 왜 술을 마시지 못할까? 술자리만 가면 그런 생각이 든다. 소주 두 잔이 내가 마실 수 있는 정량이다. 소주 서너 잔을 마시는 날에는 인사불성이 되거나 모두 토해 버린다. 게다가 얼굴이 붉어지며 온몸에 두드러기까지 생기니 술을 마시는 일은 내게는 큰 고통이다.

매케한 소독약 냄새에 살포시 눈을 떴다. 여기가 어딜까. 분명 집은 아니다. 분주한 발자국 소리와 시끄러운 소음이 어느 시장통 같기도 하다. 분명 술집에 있었는데. 실눈으로 가만히 주위를 살폈다. 웽웽거리는 사이렌 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오는 소음에 잠이 깼다. 흰 가운을 입은 몇몇이 급히 달려가고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눈을 돌렸다. 아내의 등이 보였다. 아내도 그곳을 보고 있었다. 구급차에서 내리는 환자를 보며 이곳이  응급실임을 알았다.

전날 회식이 있었다. 다른 지사로 발령받고 난 뒤 첫 회식이었다. 몸이 술에 견디지 못하니 술자리는 피하는 게 상책이었지만, 내가 부임한 기념으로 회식을 하는데 피할 방법이 없었다.

소주 두 잔이 정량인데 사십여 명이나 되는 직원에게 한 잔씩 받으면 내일 아침 출근은 고사하고 목숨마저 위태로울 것 같았다. 그렇다고 무작정 꽁무니만 뺄 수만은 없었다. 꾀를 냈다. 미리 술집 주인에게 부탁하여 빈 소주병에 물을 채웠다. 넉넉하게 여섯 병이나 준비했다. 물을 넣은 소주병에 뚜껑을 채우니 영락없는 소주였다. 든든했다. 직원 모두에게 한 잔씩 받아 마셔도 끄떡없을 것이라 생각하며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받을 때는 물병을, 상대에게는 술병을 사용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나는 그날 회식에서 한 잔도 사양하지 않고 40여 잔을 모두 받아 마셨으니 다른 직원들에게 나는 엄청나게 센 주당이 되었다. 문제는 그 뒤였다. 회식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데 누가 내 손을 잡았다. 지사장이 2차를 가잔다. 술에 취했으니 간단하게 내가 식사를 대접하겠다고 해도 막무가내였다. 자신보다 강한 주당을 만났다며 꼭 한 잔 사겠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주당은 고사하고 물 마신 죄밖에 없는데. 그렇다고 사실대로 이야기할 수가 없었다. 스탠드바였다.

바텐더 아가씨가 반원 테이블 안쪽에 앉아 있고 테이블 밖에는 반원을 따라 손님이 앉을 수 있도록 예닐곱 개의 의자가 마련되어 있었다. 지사장이 술을 시켰다. 마셔보기는커녕 이름조차 처음 듣는 술이었다. 양주병을 보자 현기증부터 났다. 그렇다고 도망갈 수도 없는 자리다. 아가씨는 친절하게 얼음과 양주 그리고 음료수를 적당히 섞어 잔을 채워 주었다. 건배하고 난 뒤 술을 버릴 곳을 찾아 머뭇거리고 있는데 자꾸 권했다. 회식 자리에서 술을 마시는 모습이 너무 멋있었다며 내내 칭찬만 하니 마시지 않을 수가 없었다. 솔직히 물을 마시는데 무슨 폼이 있었겠는가.

도망갈 수 없는 막다른 코너에 몰렸다. 몸 생각은 뒷전이고 분위기를 맞추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한 잔 두 잔 그리고 몇 차례 더 마실 수밖에 없었다. 내가 인상불성이 되기까지는 잠시였다. 그날 새벽에 병원응급실에서 잃어버린 기억을 겨우 찾았다.

술을 마시기 위해 노력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많이 마시면 주량이 늘어난다는 이야기를 듣고 대학시절 자취방에서 혼자 몇 차례 마셔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술을 많이 마실수록 고통만 더해갈 뿐 주량은 전혀 늘지 않았다. 삼십대 초반쯤 건강 검진 때 간 기능에 나빠 상담을 받았는데 담당 의사는 내게 술은 독약이라고 했다. 알콜을 해독시키는 간 기능이 부족해 지나친 술은 목숨까지 위험하다고 했다. 그때부터 더욱 술을 피하게 되었다.

요즘은 예전처럼 술자리를 피하지 않는다. 꼭 필요한 자리에서는 마신다. 가끔 서먹한 직원이나 친구에게는 먼저 술을 마시자고 권유도 한다. 그렇다고 술이 늘었다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소주 너댓 잔이면 인사불성이다. 요령이 생긴 요즘은 조금씩 물을 마셔가며 적당히 마시지만 술은 아직도 내게는 고역이다.

퇴근 준비를 하는데 전자메일이 온다. 저녁에 부서 회식이란다. 고민에 잠긴다. 오늘은 물병 작전을 써볼까, 인사불성이 될까, 나에게 주당의 길은 참으로 멀고도 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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