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광주 민주항쟁 이후 독재정권에 일갈을 가한 소년이 40여년이 지난 현재까지 ‘범죄자’라는 주홍글씨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소년 이강희씨(59·당시 18세)는 계엄법 위반으로 지난 1980년 6월 26일 새벽 자택에서 경찰에 의해 긴급체포됐다.

광주의 5월 항쟁과 관련 정부와 언론의 왜곡된 발표에 분개한 이씨가 동급생 이우봉씨와 함께 광주의 진실을 알리고자 자신들이 직접 제작한 유인물을 전주시내와 각급 학교에 배포했기 때문이다.

이들이 제작한 유인물에는 “광주사태가 지난 5월 27일 마무리됐습니다. 신문과 방송에서는 자랑스럽게 그 사실을 보도했습니다. 우리 역시 그것으로 모든 걸 넘겨 버렸습니다”, “전두환은 12월 12일 자기의 상관 정승화를 없애고 정권을 잡기 위해 서부전선에서 북괴와 대치중이던 제9사단 병력과 탱크 80여대를 빼돌려 우리의 안보를 크게 위협하였다” 등 광주 5월 항쟁의 진실과 광주시민들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현실에 대한 비판 등의 내용이 담겼다.

경찰에 체포된 소년 이강희씨는 당시 전주경찰서에 불법 구금된 상태로 3개월가량 고문을 동반한 조사를 받으면서도 가족들에게 이를 알릴 수조차도 없었다.

이에 가족들은 이씨의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 다방면으로 수소문하던 중 이씨가 같은 해 11월 17일 광주 상무대 전교사계엄보통군법회의에서 계엄법 위반으로 징역 8개월에 단기 6개월의 형을 선고받은 사실을 확인했다.

가족들은 이씨의 모진 세월을 하루빨리 끝내기 위해 1심 선고에 항소했고, 항소심 재판을 맡은 서울고등법원은 당시 미성년자였던 이씨에게 소년부 송치결정을 내렸다.

이로 인해 1년여 만에 그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왔지만, 계엄법 위반이라는 낙인으로 재학하고 있던 전주신흥고등학교에서 제적을 당하고 2년 가량 이어진 경찰의 불법적인 사찰로 인해 평범한 일상을 되찾기는 쉽지 않았다.

또 고문의 후유증으로 생긴 공황장애는 수십 년 동안 여전히 그를 괴롭히고 있다.

이처럼 5월 광주항쟁의 진실을 알리다가 모진 세월을 보낸 이들의 명예회복과 보상을 위해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됐다.

그러나 당시 5월 광주항쟁과 관련해 구속된 20여명의 다른 미성년자들과는 달리 이씨는 항소로 소년부에 송치된 탓에 특별법으로 인한 명예회복이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

이는 특별법에서 특별재심 청구는 5·18민주화운동과 관련된 행위로 유죄의 확정판결을 선고받은 자로 명시한 탓에 항소심에서 소년부 결정 처분을 받은 이씨는 그 대상이 아니라는 법원의 의견이 나왔기 때문이다.

이같은 법원의 판단에도 이씨의 주홍글씨를 없앨 기회가 찾아왔다.

서울중앙지방검찰청 공공수사부가 지난 3월 19일 이씨의 특별법에 따른 특별재심 청구 의사에 따라 같은 달 25일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재심을 청구했다.

이에 법원은 검찰에 이씨는 유죄의 확정판결이 아닌 결정의 선고를 받은 자에 해당해 재심 청구가 적법한지 문제 된다는 취지로 별도의 의견제출을 요구했다.

검찰은 통상의 재심 절차에 의한 구제는 어려운 상황으로 보이지만, 특별재심은 법적 정의회복을 위해 형법상 일반적 규정 적용을 배제하는 점, 피고인이 재심 이외의 방법으로 명예를 회복하고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점 등을 들어 이강희씨의 재심 개시 필요성에 대한 의견을 제출했다.

이강희씨 법률대리인 김환준 변호사는 “이번 재심에서 입법취지가 고려되지 않은 채 기각되거나 각하된다면, 이강희씨는 5·18 관련 구속된 이들 중 유일하게 명예회복을 하지 못한 사람으로 남게 된다”면서 “5·18민주화운동 특별법 제정 취지는 당시 위법한 공권력에 대항한 정당한 항거를 한 자에 대해 국가적 차원의 명예회복이 주된 내용인 만큼, 재판의 형식에 따라 명예회복 및 구제의 필요성이 달라진다고 해석되는 것은 입법 취지에 반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김용기자·km4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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