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동 희 (예원예술대학교 교수, 前 전주역사박물관장)

심도원은 세종 9년 7월에 전라감사로 부임하였다. 그의 아버지 심효생은 전주출신 개국공신으로 세자 방석의 장인이다. 심효생이 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 세력에게 살해되면서 심도원도 축출되었다가 복직되어 전라감사를 지내고 호조판서에 올랐다. 그의 집안은 손자 심신이 단종복위운동에 가담하였다가 처형됨으로써 중앙정계에서 멀어졌다.

▶전주출신 개국공신 심효생의 아들
심도원(沈道源, 1375~1439)의 본관은 부유(富有)이다. 부유현은 지금의 순천시 주암면 일원이다. 그의 조부는 부유 심씨의 시조로 받들어지는 지금주사(知錦州事) 심인립이고, 아버지가 바로 심효생(沈孝生)이다. 그 집안은 부유현의 토성으로 전주에 이주해 살다가 고려말에 중앙에 진출한 신흥가문이다.
심도원의 아버지 심효생은 전주유씨의 시조인 유습의 사위로 전주 출신이다. 실록에 대대로 전주에 살았다고 하나 당대에 처가를 따라 부유현에서 전주로 이주했을 개연성도 있다. 그는 고려말의 문과자로 집안은 한미하나 학문에 출중하였다. 조선 개국공신으로 정도전과 함께 방석을 세자로 옹립하고 예문관대제학에 올랐다가 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 세력에게 살해되었다.
심도원은 아버지 심효생이 문과에 급제하기 전인 1375년(고려 우왕 1)에 태어났다. 심효생은 우왕 9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따라서 심도원은 아버지 심효생이 벼슬길에 오르기 전에   살았던 전주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을 개연성이 크다. 그런 점에서 심도원을 전주출신으로 보아도 될 것 같다.

▶1차 왕자의 난 때 축출되었다가 복직
심도원은 태조 5년에 생원으로 식년문과에 동진사(병과) 5위로 급제하였다. 그의 나이 22살 때이다. 이른 나이에 급제할 정도로 출중한 역량을 가졌지만, 태조 7년 1차 왕자의 난으로 아버지 심효생이 살해되면서 그도 외방에 축출되었다.
그런데 그는 다시 복직되어 중앙정계로 나왔다. 복직 시기는, 태조대에 외방에 부처된 후 태종 10년 실록 기사에 예조좌랑으로 다시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태종대로 보인다. 태종은 정적들을 숙청하였지만 그 아들들은 다시 서용하기도 하였다.
정도전의 아들 정진도 수군으로 내쳐졌다가 복직되어 형조판서에 올랐다. 역신 장지화의 아들이 문제가 되었을 때, 태종이 “내가 심효생ㆍ남은ㆍ정도전의 아들도 폐하지 않고 서용하였다. 어찌 유독 장지화의 아들에게만 혐의가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정도전, 심효생, 남은은 조선창업후 이방원세력을 밀어냈던 핵심인물들이다. 그럼에도 태종은 그 아들들을 다시 서용하였다. 세조대에 단종복위운동에 참여한 인물의 아들을 다시 서용한 경우가 얼마나 있을까? 심도원의 복직은 태종의 정국 운영방식과 조선초 전환기의 정치상황을 잘 보여준다.

▶세종대에 전라감사 역임
심도원은 복직되어 의정부 사인(舍人), 사헌부 집의, 사간원 우사간, 호조 참의, 경기감사 등을 지내고 세종 8년 이조참판에 임용되었다. 전라감사에 임용된 것은 그 다음 해인 세종 9년으로 7월 4일에 전라감사에 제수되었고, 같은 달 19일에 전라도에 부임하였다.
그가 교체되어 전라도를 떠난 것은 이듬해 세종 10년 7월로 보인다. 실록에 세종 9년 12월에 우군동지총제로 임용된 기사가 있으나 그의 후임 전라감사 김맹성이 세종 10년 7월에 부임한 것으로 보아 이때까지 전라감사로 재임한 것으로 생각된다. 전라감사로 1년 정도 재임한 것이다. 그는 세종 10년 7월 5일 좌군동치총제에 임용되었다가 그달 12일에 다시 호조참판에 제수되었다.
전라감사 재임시, 사서 오경과 『성리대전』을 출간하라는 세종의 명을 받고 이를 판각하였다. 『세종실록』에도 이를 알려주는 기사가 있고, 『동문선』에 변계량이 지은 「사서오경 성리대전 발(四書五經性理大全跋)」에 이 내용이 실려 있다. 이때 간행된 『주역전의대전(周易傳義大全)』은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이 책은 주역에 대한 여러 주석을 모아 편찬한 것으로 전라ㆍ경상ㆍ강원 감영에서 판각하여 서울 주자소에서 인출한 것이다.

▶호조판서에 올라 세종대 공법제정
심도원은 전라감사 역임후 세종 10년 표전문을 받들고 중국에 다녀왔다. 이후 한성부윤, 황해감사, 판중추원사 등을 거쳐 세종 17년 9월 호조판서에 올랐으며 세종 21년 9월 호조판서 재임 중 65세로 졸하였다. 4년이라는 오랜 기간을 국가 재정을 책임진 호조판서로 재임한 것이다.
이때 있었던 큰일이 공법제정이다. 공법제정은 세종 10년에 본격적으로 제기되었으며, 세종 12년 답험손실법을 폐지하고 17만 명의 여론 조사를 거쳐 세종 26년(1444)에 최종적으로 전분 6등, 연분 9등의 법으로 확정되었다. 심도원은 이 세법 제정 과정에서 담당 기관 호조의 장으로서 중대 역할을 수행하였다. 
『세종실록』 그의 졸기에 인물됨을 평하기를, “빈한한 선비같이 하여 의복과 음식을 갖추고 화려한 것을 숭상하지 않으며, 마음이 평탄하고 넓으며, 조금이라도 생각한 것이 있으면 반드시 다 말하여 숨기는 것이 없으며, 일을 만나면 과감하게 결단하여 일찍이 막히는 것이 없었다.”라고 하였다. 시호는 경숙(敬肅)으로,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봉사함을 경(敬)이라 하고, 마음을 굳게 먹고 결단함을 숙(肅)이라 하였다.

▶손자 심신, 성상문과 단종복위운동을 일으켜 처형
심도원의 아들은 철보와 철한이고, 철보의 아들이 심신(沈愼)이다. 심신은 문과에 급제하고,  예문관 검열, 홍문관 수찬, 사간원 좌정언, 이조 좌랑 등 엘리트 코스를 걸었으나 세조 2년에 성삼문과 함께 단종복위운동을 일으켰다가 처형되었다. 심신은 18세기말 정조 때에 가서야 신원되어 복권된다.
 『씨족원류』 등 명문가를 집대성해 놓은 조선후기 족보들에 보면 심신을 끝으로 부유심씨 집안은 중앙정계에서 사라진다. 부유 심씨는 고려말에 일어나 왕실의 외척이 되고 심효생, 심도원, 심신 3대가 문과에 급제하는 등 두각을 나타냈다. 그러나 조선초 연이은 정치적 사건으로 몰락하였다. 이 집안은 전주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심도원이 주목되는 것은 태종의 정적으로 제거된 심효생의 아들임에도 복직되어 전라감사를 지냈으며, 그 집안이 전주에 기반을 두고 있고, 1차 왕자의 난 때 정치적으로 숙청되었다가 회복의 기미를 보였지만 결국 세조대 왕위찬탈에 반대해 몰락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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