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화 농어촌공사 전주완주임실지사장

농사는 사람이 아닌 하늘이 짓는다고들 한다. 부지런히 물을 대고, 풀을 매면서 작물을 돌본다 해도 자연으로 대변되는 날씨가 따라주지 않으면 풍요로운 결실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말이다.

특히 요즈음 여름 장마를 보면 농사가 예전의 그 농사가 아님을 알게 된다. 기후변화로 장마의 패턴이 바뀌면서 농부의 부지런함이 물거품이 되는 경우가 잦다. 
6월부터 7월까지 장맛비가 쏟아지고, 7말8초에 벼이삭이며 과실을 숙성시키는 무더위가 오는 이른바 전형적인 우리나라 여름 장마가 마른장마, 거꾸로 장마, 그리고 게릴라성 집중 호우 등으로 변하고 있다.

기후변화는 지구 전체에 영향을 주지만 특히 농사에 큰 피해를 준다. 지난 해 무려 54일간 내린 엄청난 비는 많은 논과 밭을 물바다로 만들어 정성껏 기른 농작물을 한순간에 쓸어버렸다.
이렇듯 기후변화로 농민들은 해마다 새로운 상황에 직면하고 있으니, 변해버린 자연의 얼굴을 마주하기 위한 우리의 지혜가 절실히 필요한 요즘이다.

예전에는 농사가 나랏일의 으뜸이라 농민들이 농사를 잘 지을 수 있도록 나라에서도 힘을 보탰다. 그 중 하나가 바로 태음 태양력인 24절기이다.
오래전 우리 민족은 달 운동을 기준으로 만들어진 음력을 사용했다. 그러나 음력이라고 부르는 이 달력은 계절의 변화와 잘 맞지 않아 농사를 짓거나 날씨를 가늠하는 데 불편함이 많았다.

그래서 계절에 있어서만큼은 태양이 일 년 동안 이동하는 길을 스물넷으로 나눈 24절기(양력)를 썼다. 날짜는 음력을 따르지만, 계절은 양력을 따르는 태음 태양력을 사용했던 것이다.

24절기는 계절과 더위·추위의 변화, 그리고 강수의 변화를 잘 나타냈기 때문에 농사일을 미리 준비하고 때를 놓치지 않아야 하는 농민들의 특별한 달력이 됐다.
그렇게 우리 선조들은 절기에 맞춰 뻐꾸기 울면 콩을 심고, 이팝나무 가지에 흰 밥알 꽃이 피면 들깨며 수수의 모종을 내곤 했다.

지금의 우리도 선조들의 지혜를 따라 절기가 일러주는 대로 여름의 길목인 입하가 되면 씨 뿌릴 준비를 하지만, 갈수록 위대했던 자연의 달력은 조금씩 어긋나고 있다.

풍년 농사를 위해서는 기후변화에 대비한 많은 준비와 노력이 필요하다.
농어촌공사에서도 큰 농업용 저수지를 200년에 한번 내리는 큰 비를 견딜 수 있도록 보강하고 있으며, 흙으로 만들어진 수로도 구조물로 정비하고, 배수시설을 보강해서 재해를 예방하는 등 기후변화에 대비한 노력을 지속하고 있다.
하지만 매년 여름 수마가 할퀴고 간 자리에 가득한 농민의 한숨과 눈물의 깊이를 알기에, 자연의 새 얼굴을 마주하기 위해 해야 할 일은 여전히 많다.
오래된 저수지 제방을 높이 쌓아 치수 능력을 높이고, 낡은 용·배수로를 정비해 용량을 키우며, 특히 선제적인 안전대책으로 재해피해를 최소화하는 일 등이 그것이다.

어느덧 빨라진 자연의 시계를 맞추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불철주야 발로 뛰지만, 대규모 토목공사를 통한 구조물만으로는 근본적인 대책이 될 수 없음이라.
아무리 현대과학이 발달했다지만 때에 맞지 않은 가뭄과 홍수, 폭우, 폭설 등의 자연재해는 하늘에 기대어 사는 농민들에게는 여전히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위험이다.

청보리 익어가는 들판으로 계절을 알던 시절은 지나버린 듯하다. 기후변화는 농민뿐 아니라 인류가 느끼는 공동의 불안감임은 분명하다.
24절기라는 특별한 달력을 만든 우리의 조상들이 그러했듯이, 우리 모두 힘을 합쳐 새로운 자연의 달력에 적응하기 위한 지혜와 슬기를 모아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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