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포 김구, 성리학 기틀을 다지다

김구의 발자취, 도동서원 발굴작업 이어져 본명은 ‘백일’이었으나 공자 이름 본따 ‘김구’로 개명 탁월한 문장 실력에 원나라 최고 문장가 왕악 감탄 전라일보l승인2021.08.11l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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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진유학을 정립한 공자는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라는 말을 했다. 논어 위정편에 나오는 내용으로 옛것을 충분히 익혀 새것을 안다는 뜻이다. 여기엔 배웠던 학문을 다시 연구하고 새로이 해석해 현실에 적용할 수 있는 경지에 통달한 후에야 비로소 남의 스승이 될 자격이 있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전라북도에서는 공자의 가르침대로 옛 학문인 유학을 들여다보면서 지역의 정체성을 찾고 나아가 전북을 발전시킬 방법을 찾고 있다. 그에 발맞춰 전라일보는 유학을 진흥시키기 위해 노력했던 전북의 유학자들을 10회에 걸쳐 조명해보고자 한다. 전북유학의 맥 탐사라는 이름으로 그들의 정신과 가르침을 다시 배우며 전북유학에 대해 새롭게 해석해볼 것이다.


전북에는 불교사상을 대체할 새로운 학술 사상으로 성리학을 도입하고 그것을 부흥시키는 데에 선도적인 역할을 해낸 인물이 있다. 그의 발자취를 쫓아 부안군 변산면 운산리로 향했다. 빨갛게 물든 백일홍 사이로 보이는 경지재. 경지재는 지포 김구의 후손들이 그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마련한 재실이다. 나라의 부흥을 위해 성리학 진흥의 발판을 마련한 그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경지’라는 단어를 사용했고, 이에는 ‘늘 공경하고 근면히 실행하라’는 김구의 학문적 정신이 담겨 있다.
1211년(희종 7) 지금의 부안군 선은리에서 태어난 김구는 유형원, 전우와 함께 하는 부안 3현의 선구인물이다. 이름은 구(坵)이고, 자는 차산(次山), 호는 지포(止浦),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본래 이름은 백일(百鎰)이었으나 후에 개명하였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모든 것이 중요하던 시절, 본인 의지로 개명하는 일이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럼에도 공자의 이름인 구(丘)를 본 따 김구로 개명했다는 대목에서 그가 유학을 진흥하고자 하는 의지가 얼마나 강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김구의 자는 ‘차산(次山)’이다. 여기에는 유학의 으뜸이 되는 첫 번째 산은 공자이며 자신은 두 번째 산이 될 것이라는 강력한 자신감이 담겨 있다. 이러한 사명감과 자신감으로 김구는 성리학 도입에 선도적 역할을 하였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시 짓기를 잘해 신동이라는 소문이 자자했다. 후에는 고려의 문형을 잡고 외교문서 작성을 전담했는데 당시 원나라 최고의 문장가 왕악이 감탄할 정도로 문장 실력이 뛰어났다. 김병기 전북대 명예교수는 “조선 성종 때 서거정이 펴낸 『동문선』에는 김구의 작품이 약 90여 편 수록되어 있다”며 이는 “고려 말 뛰어난 문인으로 평가받는 익제 이제현의 경우와 대등한 편수이다”라고 말했다. 김구는 고려 말을 대표하는 문학가인 것이다.
1276년(충렬왕 2) 참문학사(參文學事)이던 김구는 통역관을 양성하는 기관인 통문관 설치를 건의하여 실행하였다. 당시 통역관을 설인(舌人)이라 불렀는데 대부분 미천한 신분으로 지식이 풍부하지 못해 오역을 하거나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일부러 잘못 번역하는 등의 폐단이 있었다. 이를 바로 잡고자 역어교육과 통역업무를 담당하는 기관을 설치한 것이다. 이후 통문관의 후신으로 사역원이 설치되어 조선시대까지 존속하며 여러 외국어의 번역과 통역 실무를 담당했다.
제주도에는 천년이 넘는 세월에도 남아있는 그의 흔적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1234년 24세의 판관 김구가 농지의 재산권 분쟁을 막기 위해 밭담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그는 백성들의 고충을 줄이기 위해 밭담 쌓기를 정책적으로 장려했다. 밭담이 밭과 밭의 경계를 형성함으로써 농민들의 재산권 분쟁이 줄었으며 야생동물로부터 농작물을 보호하는 효과까지 있었다. 이러한 가치와 중요성을 인정받아 지난 2013년에는 우리나라 최초 국가중요농어업유산으로, 지난 2014년에는 FAO(국제연합식량농업기구)의 세계중요농업유산으로 등재되기도 했다.
최근 김구가 이뤄낸 업적과 문화적 가치를 재조명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지난 2018년에는 부안군 부안읍 연곡리에서 도동서원지 문화재 지표조사가 이뤄졌다. 김영렬 부안문화원 원장은 “도동서원은 1534년(중종 29)에 김구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며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보다 약 8년 앞서 건립되었다”고 전했다.
부안군에서는 지표조사를 시작으로 계속해서 발굴작업을 이어나가고 있다. 양종천 석동마을 이장은 “도동서원 터가 있는 석동마을이 2021년 전라북도 테마가 있는 자연마을 조성사업에 선정되었다”며 “지포 김구 선생의 뜻을 잇는 도동서원을 더 많은 사람들이 알 수 있도록 마을 차원에서 힘쓸 것”이라고 밝혔다.
/임다연·장소은인턴기자


김병기 전북대 명예교수

전북유학을 말하다

유학은 공자의 사상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한반도에 유학이 들어온 것은 삼국시대라고 추정된다. 신라 말 최치원으로 말미암아 유학이 더욱 주목을 받았고 고려에 들어서는 종교는 불교를 신앙했지만 학문과 정치는 유학에 바탕을 두었다. 1170년(의종 24년) 발생한 무신정변으로 무신정권이 들어서며 문관의 수가 급격히 줄면서 유학은 쇠퇴하고 불교가 더욱 흥하여 학문과 정치도 불교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되었다.
이러한 시기에 김구는 원나라를 건국하기 전 몽고를 다녀오면서 중국에 불기 시작한 성리학의 바람을 경험하였다. 유학 특히 신흥학문으로서의 성리학이 난만해진 불교의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그는 유학 진흥에 더욱 힘쓰게 됐다. 공자의 이름인 ‘구(丘)’와 사실상 같은 이름자인 구(坵)를 쓴 김구의 이름에서도 유학을 진흥하고자 하는 의지가 드러나지만 그의 아들들을 통해서도 김구의 포부와 실천의 의지를 확인할 수 있다.
장남인 김여우(金汝盂)는 충렬왕과 원나라 제국대장공주의 혼인을 성사시킨 공로로 단권(丹券)을 하사받았다. 혼인동맹을 성사시켜 원나라의 부마국이 됨으로써 고려는 당시 몽고의 정복아래 있었던 다른 나라와 달리 고려의 국호를 유지하고 왕통을 계승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써 고려는 유라시아 대륙에서 몽고의 원나라와 함께 독자성을 인정받는 양대 국가로 존재할 수 있게 되었다. 혼인동맹을 성사시키기 위해 4년간 원나라에 머무르며 원나라의 성리학진흥 정황을 목도한 김여우는 귀국 후에 당시 강릉안렴사(江陵按廉使)로 있던 동생 김승인(金承印)에게 원나라에서 보고 온 교육과 제향을 겸하는 공간으로서의 향교를 세우도록 권했다. 김승인은 형의 제안을 수용하여 우리나라 최초로 교육과 제향의 기능을 겸하는 형태의 향교인 강릉향교를 세웠다.
김구와 그의 아들들은 유학 진흥의 의지를 가지고 성리학을 도입하는 데에 선도적인 역할을 했으며 이 땅에 새로운 사상인 성리학을 실천적으로 태동시킨 인물이다. 이러한 새로운 사상 태동의 정신이 후세로 이어져 전북 부안에서는 난만해진 성리학에 대한 대응으로 실사구시의 실학을 주창한 반계 유형원이 출현하였고, 일제의 침략과 서양문물의 유입 와중에서 후대를 위해 전통 유학의 불씨를 지킨 간재 전우 선생이 배출되었다. 이처럼 전북은 새로운 사상이 태동한 지역으로서 특별한 의미를 지니기 때문에 전북유학은 지포 김구를 태두로 삼아 더욱 연구되어야 하고 인정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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