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 정도 천념 기념사업을 한지 얼마 안 됐는데 요즘 전라도는 각자도생의 분열의 길로 가는 것 같아 안타깝다. 전주·전북이 광역의 길을 모색하려고 하는 데 비해 광주·전남은 초광역 메가시티의 길을 가려고 한다. 각기 나름의 명분과 이유가 있다. 북도는 전라도의 수도로서 역사문화 전통과 남도와의 차별성을 강조하며 독자적 광역권을 추구하고자 한다. 남도는 전라도에서 나름대로 인구가 집중되고 경제화의 정도가 앞서기 때문에 남도 중심의 초광역 메가시티 구축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여기에 전주·전북을 포함시키는 게 마땅하다고 한다. 그러나 일부 정책학자들은 북도의 광역권을 새만금·전북 광역권으로 비전을 확대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일이 이렇게 된 것은 원인이 매우 많고 과정 또한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하다. 역사적으로 고찰하면 북도와 남도의 문화차이가 크다는 데 그 원인이 있다. 북도는 마한의 중심지로서 고대문화를 성립시키고, 백제시대에는 중방(정읍 고사부리)과 남방(남원 구지하) 지역, 후백제시대에는 도읍지로서, 그리고 조선시대에는 왕조의 본향으로서 자존심을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남도는 마한의 고분군 등을 내세워 「역사문화권 정비 등에 관한 특별법」에 영산강 유역을 중심으로 전남 일대 마한 시대의 유적ㆍ유물이 분포되어 있는 지역을 선점하고 있다. 마한의 중심지인 익산을 비롯한 북도지역이 빠져 있으니 북도 인심이 흉흉하지 않을 수 없다.

역사적으로 더 살피면 후삼국의 통일 과정에서 전주와 나주의 역학 관계이다. 전주는 후삼국 시대 가장 강성한 나라인 후백제의 왕도이다. 나주는 견훤 중심의 백제를 멀리 하고 왕건 중심의 고려에 협조했다. 결과적으로 견훤은 나주 세력을 끌어들이지 못함으로써 멸망의 길을 가지 않을 수 없게 됐다. 나주 세력은 889년 후백제 건국 원년부터 930년까지 해양세력으로 왕건의 실질적인 통치를 받았다. 견훤은 절치부심 끝에 930년부터 935년 4월까지 나주지역을 복속시켰다. 그러나 왕건의 집요한 공략으로 다시 고려에 나주지역을 빼앗기며 삼한통일의 눈앞에서 936년  분루를 삼켜야 했다. 전주와 나주가 통합했으면 역사는 어떻게 됐을까?

이런 역사 속에 1018년(고려 현종 9년) 5도양계제를 실시하면서 전주와 나주를 묶고 제주를 포함시켜 전라도를 두었다. 그 이후 천년이 넘는 세월 속에서 전라도는 전주를 수도로 삼아 하나의 문화를 세우고 하나처럼 지내왔다. 전라도는 현대에 이르러 군부 독재에 맞서 싸우며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이룩했다. 민주화는 정여립의 대동사상에서부터 동학혁명의 인내천 사상, 항일독립전쟁, 그리고 민주화 투쟁의 정신을 밝혔으니, 바로 전라도 정신의 구현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겪고 있는 현실을 보면 제주도를 포함하는 대전라도 정신은 너무도 먼 추억으로만 남아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북도와 남도도 어느 새부터 전라도 몫을 서로 더 챙기기 위해 심하게 갈등을 빚고 있다. 국가사업 추진과 예산 배정, 인물 발탁, 공공기관배치 등에서 상당 부분 갈등의 골이 깊어지고 있다. 오죽하면 남도 중심으로 운영되던 호남향우회에서 조차 전라북도 향우회가 뛰쳐나오려고 하며, 전라북도의 자존심 살리기 운동이 펼쳐질까?

북도는 과거 독재정권이 저지른 불균형개발 정책의 피해를 고스란히 겪고 있다. 북도의 심각한 낙후는 국가적 쟁점으로 대두되고 있다. 대통령 후보 경선 과정에서 후보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이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소위 효율성만을 내세우며 북도를 희생시킬 경우 갈등만 키울 우려가 있다. 남도와 북도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의 대통합의 길을 가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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