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단풍철이 다가왔다. 청정 무주 적상산에 가면 조선왕조의 숨결을 더듬을 수 있다. 온갖 역경을 걷어내고 적상산사고에 둥지를 틀었던 선조실록, 태조실록 등 영인본들이 고스란히 간직돼 있다. 이에 조선왕조의 역사와 왕의 기록을 담은 조선왕조실록 보관한 적상산사고(史庫)에는 조선의 맥과 혼을 가득 담고 있다. 실록은 많은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다. 병자호란때 실록을 보호하기 위해 안렴대로 잠시 실록을 숨기는 파란만장한 역사의 한 페이지를 갖고 있다. 안국사에서 우측 방향으로 가다보면 지금도 그 터가 있다.
무주군 적상면 북창리 초리 마을에서 괴목로를 따라 북쪽으로 800m가량 가면, 적상산성(赤裳山城)과 안국사 등으로 진입할 수 있는 도로와 만나는 삼거리가 나온다. 삼거리에서 적산산성 방면으로 9.5㎞가량 오르면 자연경관이 빼어난 적상호를 만나게 되고 곧바로 적상산 사고지(赤裳山史庫址)에 도착한다.

#적상산사고, 조선왕조실록 보관, 조선역사를 품었다
조선왕조실록은 태조부터 철종에 이르기까지 25대, 472년간의 역사적 사실을 연, 월, 일 순서에 따라 기록한 역사서다. 총 1,893권 888책으로 구성돼 있다. 조선왕조실록은 양의 방대함은 물론 외교·정치·제도 법률 등 각 방면의 역사적 사실을 망라하고 있는 세계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든 역사 기록물로 꼽힌다.
조선왕조실록은 임진왜란과 1910년 일제의 민족말살 정책과 한국동란을 겪으면서 사수와 소멸이라는 우여곡절 끝에 사고지도 기나긴 험로를 걸어야만 했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실록을 정리·편찬하여 5부를 완성하고 춘추관·마니산·태백산·묘향산·오대산에 각 1부씩 보관했다. 이 가운데 북측에 자리한 묘향산사고는 만주에서 일어난 후금과의 관계가 악화되자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하는 현실에 부딪혔다. 1610년(광해군 2년) 순안어사 최현과 무주현감 이유경의 요청에 따라 사관을 적상산에 보내 땅 모양을 살피게 하고 산성을 수리해 광해군 6년(1614) 이곳에 사고를 설치하게 하여 실록전을 창건함으로써 무주 적상산 사고가 들어서게 됐고 이로인해 무주현은 도호부로 승격하는 계기가 됐다. 하지만 누가 이일을 맡아 했는지에 대한 기록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적상산사고는 오대산이나 태백산사고와는 달리 산성안에 건립된 점이 특징이다.
따라서 사고 설치 이전에 산성의 상태 점검과 수축이 우선됐으며, 이 일은 승려가 맡아 했고 일의 편리를 위해 먼저 승려가 머무를 사찰을 건립했다는 설이 전해진다. 즉 승려의 파견과 사찰건립, 이어 산성의 수축을 마친 뒤 마지막으로 사고가 건립된 것으로 보여진다.
고종39년(1902) 3월 비서원람겸임 종정원주사 유인청이 명을 받고 사각과 선원전을 보수한 후 상량문과 재료, 품목, 수량, 금액 등을 상세히 기록한 적상산성 선사양각 역비명세서가 전해져 내려와 마지막 개수한 기록이 남아있다.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무주 적상산사고에 소장돼 있던 조선왕조실록이 김일성 대학으로 강제로 옮겨가 소장돼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학계에서는 북한 국가문서고에 소장돼 있다는 설도 제기하고 있다.
그 후 1997년 선원각과 1998년 실록각이 각각 복원돼 태종 및 세종, 인조, 영조실록 등의 영인본이 조선왕조실록 혼을 살리면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현재 정면 3칸, 측면 3칸의 선원전과 실록전 건물 2동이 복원되어 있으며, 그 주변은 담장이 둘러져 있다. 면적은 6,083㎡이다. 1995년 6월 20일에 전라북도 기념물 제88호로 지정되면서 체계적인 보존 관리가 이루어지고 있다.
사고 수호는 사찰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적상산사고에는 안국사와 호국사를 두어 승려들이 군사와 함께 사고를 수호했다. 한 때 실록을 숨겨 놓았던 안렴대가 원형 그대로 보존돼 있어 관심을 끌고 있다.
적상산사고는 비록 본래의 위치에서 이전 복원되기는 했지만, 조선 후기 5대 사고 중 하나로서 그 역사적 가치가 대단히 크다. 또한 정식 발굴 조사를 통해 건물 터의 구조 및 현황이 어느 정도 밝혀졌기 때문에 조선 시대 건축사를 연구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더불어 적상산의 빼어난 자연경관을 바탕으로 안국사와 적상산성의 유서 깊은 문화 유적과 인접해 있어 무주군을 대표하는 관광 명소라고 할 수 있다.

#사고와 실록 어떻게 보관·관리 됐나
적상산사고에서 만난 무주군 김진남 문화해설사는 사고와 실록에 보관 과정을 아주 생생하고도 친절하게 들려줬다.
김 문화해설사는 “사고는 역대 실록을 비롯하여 중요한 문헌을 보관했던 곳으로 이에 대한 관리가 매우 중요했다. 실록의 부패를 방지하기 위해 포쇄작업에 많은 인근 주민과 관리인들이 동원돼 구슬땀을 흘려야 했다”고 전했다. 그는 “포쇄작업(실록을 햇볕과 바람에 말리는 작업)은 역사성의 가치가 충분히 있는 만큼 이것도 재현행사에 포함해, 우리네 선조들이 실록을 보관하면서 흘린 땀과 열정을 후세들도 배워야 할 것”이라고 제시했다.
그리고 그는 “실록의 혈이 흐르고 있는 안국사의 천불전이 전라북도 지정 문화재로 지정돼 후에 국가보물로의 지정도 돼야 무주군민들의 자긍심을 더욱 살리게 될 것”이라고 역설했다.
1937년 9월 당시 주지 김창수에 의해 선원전 건물이 안국사 경내로 옮겨졌고(1992년 이건시 상량문서 확인됨)이밖에 부속건물들은 모두 훼철된 채 주초석만 남아 있다.

#무주, 조선왕조실록 봉안행렬 재연행사 열려
지난 2019년 무주군민들의 많은 관심속에 조선왕조실록 봉안행렬 및 봉안식 재연행사가 열렸다. 적상산사고에 실록을 봉안했던 모습을 재연한 것이다. 하지만 지난해에는 코로나19로 인해 취소됐다. 실록의 이동은 엄숙한 국가 의례였다. 한양에서 이송된 실록이 무주관아에 도착하면 대규모의 환영식이 펼쳐졌고, 관아에 임시로 보관했다가 관상감에서 정해준 날짜와 시각에 사고지로 이동했다. 관아에서 사고로 이동할 때도 의장대가 갖춰져 풍악을 울리며 행진했다.
행사는 실록 환영 행렬과 무주 관아에 보관하는 보관식, 사고에 실록을 안치하는 봉안식 등의 순으로 진행됐으며 인근 주민은 물론 무주를 방문한 관광객들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무주만의 역사문화와 콘텐츠로 자리잡다
무주군과 무주문화원은 앞으로도 조선왕조실록 봉안행렬과 봉안식을 무주만의 특화된 전통문화유산이자 관광자원으로 발전시킬 계획이다. 오는 11월 11일 조선왕조실록 봉안행렬 재연행사를 계획하고 있다. 올해 반딧불축제때 이 행사를 추진하려 했으나 코로나19로 축제를 취소하는 바람에 아쉬움이 컸다.
군은 과거 묘향산 사고본 이안을 테마로 잡아 학술용역을 진행하고 재연하고자 계획 중이다. 특히, 복식 고증 등을 더욱 정교하게 진행한다는 방침으로 군민들의 자긍심을 높이는 한편, 역사 지킴이었던 무주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계기도 될 전망이다.
지난 9월에는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했던 무주 적상산사고가 한국관광공사가 꼽은 가을시즌 비대면 안심관광지에 등극했다. 조선의 맥과 혼을 담은 적상산사고가 가을의 정취를 안전하고 편안하게 즐길 수 있는 더할 나위 없는 좋은 곳으로 평가받은 것이다.
한편, 무주군은 적상산성 종합정비계획을 바탕으로 적상산성 종합정비 사업을 진행중이며, 최근 성문의 위치와 형태, 축조방법 등을 담은 시굴조사를 완료하면서 오는 2035년까지 학술조사와 탐방로정비, 유적정비 등을 진행할 계획이다.
/최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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