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덕과면 동해골 삼일운동기념탑

△마을 유래

남원시 덕과면(德果面)은 덕고방과 적과방 등 2개 방이 있었던 지역으로, 1897년(고종 34)에 8도를 13도로 개편하면서 방이 면으로 바뀌었고, 기존 덕고면이 덕과면의 중심이 되었다.

이후 일제강점기인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덕고면의 신정·월평·내동·갈산·사곡 등 10개 리와 전과면의 만적·도촌·신촌·하율 등 9개 리, 그리고 고절면 다산리 일부, 지사면 현계리 일부, 장수군 외진전면의 시목리 일부를 병합해 덕고와 적과의 이름을 딴 ‘덕과면’으로 칭하고, 만도·신양·사율·덕촌 등 7개 리로 개편해 면 청사를 사율리에 두었다.

1954년 4월 20일 공비들의 습격으로 청사가 전소되자 고정리에 있는 농협창고로 잠시 면 청사를 옮겼다가 1980년 12월 30일 청사를 세워 덕과면 덕과 월평길 3번지로 이전했다.

1983년 2월 15일 행정구역 개편에 의해 금암리(북금·남금·내동 등 3개 마을)가 임실군 오수면으로 떨어져 나갔고, 1995년 1월 1일 남원 시·군 통합으로 군이 폐지돼 남원시 덕과면이 되었다.

전주~남원의 관문에 위치해 있는 남원시 덕과면은 큰덕(德) 과실과(果)라는 이름에 걸맞게 ‘사과배(apple pear)’라고도 불리는 황금배를 비롯, 복숭아, 사과 등 고품질의 큰 과실이 많이 생산되기로 유명한 곳이다.

최근에는 친환경 딸기, 양파, 고추 등 고소득 원예작물이 생산돼 소비자들로부터 각광을 받고 있다.

하지만 덕과면은 3·1기념탑을 비롯한 다양한 문화유산들을 보유하고 있어 마을의 과거, 현재를 끊임없이 보여주는 곳이기도 하다.

 

△3.1독립만세운동 남원 최초 발상지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이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만세삼창 후 일본 경찰에 연행되었다.

낭독된 독립선언서는 탑골공원에서 기다리고 있던 학생들을 비롯한 민중들에게 전달되었고, 수십만 명의 인파가 거리로 쏟아져 나와 만세운동을 벌였다.

그리고 그렇게 시작된 만세운동은 평양, 의주, 안주, 원산을 비롯한 이북은 물론,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3.1운동 당시 덕과면장으로 근무하고 있던 이석기는 독립만세운동을 남원에서 실행하기로 결심한다.

이후 6촌 동생인 이성기와 면직원 조동선을 비롯한 면내 유지들과 비밀리에 모인 이석기 면장은 4월 3일 연례적으로 벌어지던 식수(植樹) 행사에 사람들이 모이는 것을 이용해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결의했다.

만세운동에 앞서 이석기 면장은 남원군의 각 면장에게 만세운동 참가취지서와 경고아동포제군(警告我同抱諸君)이라는 격문을 작성해 배포했다.

드디어 4월 3일, 덕과면 신양리 뒷산인 동해골에는 식수기념일 행사를 위해 800여명의 남원군민이 모였다. 오후 식수가 끝난 뒤, 행사에 참여한 면민들에게 탁주를 대접하면서 조선의 독립이 필요함을 강조한 이석기 면장은 앞으로 나가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며 만세운동을 시작했다. 그것이 남원에서 시작된 첫 만세운동이다.

그렇게 시작된 만세운동은 4월 4일 남원읍내로 이어져 남원 장날에서 더 크게 전개됐고, 광한루 광장에 모인 1000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남문을 거쳐 시장으로 시위행진이 전개됐다.

이날 가장 앞장서서 만세를 불렀던 방극용은 일본군경의 총탄을 맞고 쓰러져 남원 3.1운동의 첫 번째 순국자가 됐으며, 이석기 면장 역시 체포돼 10월 4일 고등법원에서 일제의 보안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기에 이른다.

세월이 흘러 1998년 남원시 덕과면 동해골에 3·1만세운동 발상지 기념탑이 세워졌고, 1919년 만세운동에 참여해 희생당한 수많은 순국선열을 추모하고 남원에서 최초로 일어난 3·1만세운동을 기념하고 있다.

국가보훈처에서는 2002년 11월 1일 이곳을 현충시설로 지정했으며 남원시에서는 매년 3월 1일 이들의 의거를 추모하고자 덕과면 동해골 삼일운동 기념탑 아래서 기념식과 함께 이날의 만세운동을 재현하고 있다.

 

△호암서원과 호암시비 공원

덕과면 만도리에는 수많은 유림을 배출하고 지역사회 학문의 전당이었던 조선 정조 13년(1789)년 창건된 호암서원이 있다.

현재의 덕과면 도촌마을에 위치해 있는 호암서원은 본래 다른 곳에 있었던 것을 1789년(정조 13)에 지금의 자리로 옮기면서 호암서원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폐쇄됐으나 1961년 다시 복원됐다. 현재 사당 1동과 행랑 1동이 역사의 증인이 되어 자리를 지키고 있다.

호안서원은 조선 태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서(李舒)를 주벽(主壁)으로 하여 심구령, 안성, 소연, 소산복, 이당 등 6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건축물 보존 상태가 양호한 편이며, 매년 3월 이들의 제사를 지낸다.

덕과면 만동마을 입구의 호암시비 공원에는 선인들이 남긴 주옥같은 시 18수가 대리석에 새겨져 보는 이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조선 중기의 이 고장 출신 유학자 김택(金澤)은 용성지(龍城誌)에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한가로운 숲속 생활 어느덧 늘그막이니

고작 백년 인생인데 가난타고 우울하리오

깊은 뿌리 키 큰 대나무 시고 열심히 가꾸며

시냇물을 연못에 끌어 여울을 이루었네 <이하 생략>

 

△ 보물 792호 이상길 영정과 사곡마을 소나무 숲

덕과면 사율리 사곡마을도 눈에 띄는 곳이다.

조선 중기 문신이었던 충숙 이상길(忠肅 李尙吉. 1556~1637)은 1580년 명당을 찾아 전국을 다니다가 남원 사곡땅이 자손이 번창할 곳으로 보고 둘째 아들 계를 이곳에 살게 함으로써 마을을 형성하게 한 장본인이다.

사곡이란 마을 이름은 ‘배가 짐을 가득 싣고 있는 형국’에서 비롯된 말로, 한때 ‘삽실’로 부르다가 인근의 작은 마을 ‘새터’와 ‘소나무정’을 합쳐 ‘사곡’으로 부르게 됐다.

당시 마을을 조성했던 이상길을 그린 초상화가 지금도 마을에 전해진다.

이상길의 영정은 낮은 사모에 담홍색 단령을 입고 공수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의자에 앉은 좌안 8분면의 전신상으로 10평 정도의 사당에 필사본 영정 1점이 전해진다. 이상길은 병조참판, 대사간, 대사헌을 거쳐 공조판서를 역임한 인물로, 인조 15년 병자호란 때 청나라 침략에 대항해 강화도에서 종묘를 지키다 순절한 충신이다. 이 영정은 벽진 이씨 문중에서 보관하다 원본은 후손들의 뜻에 의해 현재 전주박물관에서 위탁 관리하고 있다.

이상길의 후손인 이지광과 이지량 형제는 1636년 덕과면 사곡촌으로 이사와 마을 사람들에게 무엇을 남겨 줄까 고심하다 소나무를 심기로 했다. 이렇게 심어진 소나무는 300여년이 흐르면서 마을의 보물로 자리잡았다.

사곡 소나무 숲은 2009년 생명의 숲과 산림청, 유한킴벌리에서 주관한 제10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 마을 숲 부문에서 ‘아름다운 어울림상’(장려상)을 수상했다. 특히 이곳은 천연기념물인 크낙새의 서식지로도 알려져 있다.

2013년에는 산림청이 실시한 ‘전통마을숲 복원’ 대상에 선정돼 콘크리트 도로를 철거하고, 병든 나무에 대한 외과수술과 지지대 설치, 후계목 조성사업을 추진한 바 있다.

사곡마을 숲 소나무는 총 70여 그루로 모진 비바람에 대부분 비스듬히 기울어 있다. 하지만 사곡마을을 상장하는 명품 소나무 숲으로써 마을 사람들뿐만 아니라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휴식과 힐링의 공간이 되고 있다.

/최병호기자·hoya0276@
/김수현 기자  ksh5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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