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화정이, 지아미 고개를 얼른 넘어 여산읍을 당도하였고나, 그때의 어사또는 여산이 전라도 초입이라 서리역졸을 각 처로 분발헐제~”

어사 이몽룡이 남원으로 내려갈 때 말한 ‘춘향가’의 한 대목이다 여산은 익산시 북동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호남고속도로의 여산휴게소가 있는 지역이다.

조선 때는 한양에서 경기도, 충청도를 지나서 전라도 초입이 바로 여산이다. 호남의 관문이자 국도1번 도로가 지나는 풍요의 고장 전북의 입구이다.

여산은 일제 강점기때 호남선 철도가 부설되기 전까지 익산의 중심지였다.

 

여산면 원수리 신막(新幕)마을은 새술막의 한자표기다. ‘큰 길가에 새로 생긴 술집’이라는 뜻인 새술막은 교통의 요충지 여산의 대표적 마을이다.

이곳은 금마로 넘어가는 쑥고개의 초입마을로 과거 나그네의 쉼터였던 곳이다. 강경 상권이 번창했던 일제 강점기까지 말을 관리해 주던 곳이기도 해서 한양과 전라도를 오고가는 나그네들의 쉼터이자 안식처이다.

호남의 관문 여산에 천주교 성지가 생긴 것도 역시 교통의 입지가 편리했기 때문이다. 인근에 최초 전래지인 나바위 성당이 있고, 인적, 물적자원이 풍부해서 태성리에는 천주교 교우촌이 형성될 정도 였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의 박해가 시작되자, 여산읍내에 백지사형터가 생겼고 쫓겨난 신자들은 화산 너머 산골에서 화전과 항아리 장사를 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 전라도관찰사의 신구임 교대의식이 치러진 여산.

조선시대 후기 대표적 실학자인 전라도 관찰사를 역임한 풍석 서유구가 기록한 전라도 관찰사 행정일기 ‘완영일록’은 서유구가 전라도관찰사로 재직하던 1833년(순조 33) 4월부터 1834년(순조 34) 12월까지, 전라도 감영, 즉 완영(完營)이 있는 전주에서 지방 통치 및 재정 운영에 관여하여 수행한 공무를 일기 형식으로 서술한 기록이다.

국왕으로부터 전라도관찰사를 제수 받아 여산 황화정에서 신구임 교대의식을 치르고 전주 조경묘에 숙배하고 전라감영 선화당에 이르는 7일에 걸친 전라도 관찰사 부임 과정이 매우 사실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완영일록에는 전라도 53개 군현과 법성진, 고군산진 등에 공문을 발송한 특이한 내역도 기록됐으며 병영 및 각 진(鎭) 등의 행정·군사·사법 등 전라도관찰사의 제반 업무에 대한 지방통치 행정 기록이 풍부하게 담겨 있다.

또한, 1833년 6월 15일 기록에 보면, 전라도내 수령 등 70명에 대한 상반기 인사 고과(考課) 내용을 ‘춘하등(春夏等) 포폄방목(褒貶榜目)’으로 상·중·하로 기재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 조선전기 선비의 얼이 살아 있는 여산향교

1403년(태종3년) 여산면 여산리에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창건된 여산향교는 옛 여산부 관아에서 운영했던 중등교육기관으로 향교들 가운데 규모가 큰 편이다. 강당이 앞쪽, 대성전이 뒷쪽에 위치한 전학후묘의 공간배치를 하고 있다. 대성전, 동.서재, 명륜당, 전사청 등의 건물이 남아 있는데 그 중 대성전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대성전은 앞면3칸 규모를 하고 있으며, 강당인 명륜당은 앞면 5칸 규모이다. 유생들의 머물던 기숙사는 남아 있지 않으며, 동.서재로 불리는 대성전 앞 건물은 그 형태로 볼 때 선현들의 위패를 모시는 동.서무에 해당하는 건물로 보인다. 임진왜란때 소실되었다가 그뒤 지방유림에 의해 중건되었으며 지금의 모습은 여러번의 중수를 거쳐 전면 보수한 것이다.

 

▲ 여산성당, 천주교 순교자의 성지와 척화비

여산면에 천주교가 전래된 것은 천주교 박해를 피해 이곳으로 이주해온 신자들이 모여살면서부터였고 1868년 무진박해 때에는 이곳 신앙촌에 거주하는 신자 26명이 체포되어 순교했다.

조선말 대원군의 쇄국정책과 천주교 말살 정책으로 시작된 병인박해(1866년)는 1868년 무진년에 이르러 가장 치열했다.

여산성당은 익산시 여산면 여산리 196번지에 있는 전주교구 소속의 가톨릭 천주교회로 익산시 여산면 지역 순교 역사와 성지를 기념하기 위해 여산 숲정이 순교성지에 건립됐다.

고산, 진산, 금산 등 지역에서 붙잡힌 김성첨[토마스] 가족 6명을 포함하여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여산 동헌으로 끌려와 동헌 앞 백지사(白紙死)터, 감옥, 숲정이, 장터 등지에서 백지사형과 참수형, 교수형을 당해 순교했다. 옛 동헌 뜰에는 당시의 박해사실을 증명하듯이 대원군의 척화비가 서있다. 척화비에는 양이침범 비전즉화 주화매국 (洋夷侵犯非戰則和主和賣國) “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해를 하자는 것이니, 화해를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여산성당은 건립된 뒤로 성당 증개축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성당 주변 순교 성지 개발도 함께 추진되는 등 개발이 추진됐으며 여산성당과 여산 숲정이 순교성지는 지금도 순례자의 발걸음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 국문학자이자 시조작가인 가람 이병기선생의 가람문학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는 없다”라는 단재 신채호 선생의 말씀이 생각나는
전라북도 익산시 여산면 원수리 573. 가람문학관은 한국 현대시조의 중흥을 이룩한 시조시인이며 국문학자인 가람 이병기 선생을 기리기 위해 준비된 가람문학관과 이병기생가가 있다.

생가 옆에 자리잡은 익산의 대표적인 문학여행지 가람문학관은 우리나라 글과 문학의 소중함을 후손들에게 전해지길 간절히 바라셨다는 가람의 발자취를 파악할 수 있게 한다.

가람문학관은 문학 앞에서 자유로우면서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들 모두에 열려있던 가람선생의 모습을 보여주고 소박했던 마음을 잘 담아내고 있는 듯하다.

일제의 우리말 말살정책에 대항하여 민족혼 살리기에 앞장서고 ‘한국 근현대 시조와 국문학 커다란 족적을 남기신분이다. 교펜을 잡고 서울대 교수로 재직하시면서 많은 제자를 양성했다. 대표저서로는 <국문학전사>,<역대시조선>,<가람문선>,<국문학개론>등이 있다.

 

이병기 선생이 태어난 생가는 전라북도 기념물 제6호로 안채와 사랑채, 고방채, 정자 등 여러 채의 초가로 이루어져 있다.

입구에는 승운정(勝雲亭)이라는 1칸 규모의 모정이 있고, 그 옆으로 사랑채를 길게 배치한 후 앞에 작은 연못을 파 놓았다. 사랑채는 一자형의로 조성된 집이다.

전후 퇴집의 구조로서 전면은 툇마루를 구성하고, 안마당에 면한 툇간은 골방과 창고, 다락 등 수장 공간으로 사용한다. 진수당(鎭壽堂)이란 편액이 붙은 끝 방은 가람이 책방으로 사용했으며, 평소 기거하던 곳은 한 칸 건너 수우재(守愚齋)라는 편액이 붙은 방이다.

수우재와 책방사이는 칸 전체를 다락으로 만들었으며 밑은 양측 두 방 모두 구들에 불을 지필 수 있는 아궁이를 만들고 그 위 공간을 이용하여 다락을 만든 것이다.

옛 조선부터 근현대까지의 길고긴 역사문화를 잘 정돈되어 담고 있는 소박한 초가의 모습이 남있는 이병기 생가터와 가람문학관을 방문하며 깊은 여운을 남기는 여행, 축을 간직해짐도 좋을듯하다.
/최병호기자·hoya0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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