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들의 열망 키우고 아픔 달래준 ‘어머니의 산’

<13> 김제 모악산 아랫마을 최병호 기자l승인2021.11.25l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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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악산도립공원 아래 마을풍경

김제, 부안, 전주, 익산, 정읍 사람들은 어머니의 산인 모악산을 보고 자란다. 어머니의 산답게 모악산은 모를 심으면 농사기간 내내 넉넉한 물을 아낌없이 내어주고, 가을엔 풍성한 수확의 기쁨을 맛보도록 한다.

광주의 무등산, 세계 최고봉인 에베레스트도 역시 어머니의 산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나 에베레스트는 극소수 인간의 발길만을 허용했을 뿐이다.

사람들과 친근한 모악산은 만경강(80.86km)과 동진강(44.7km)의 젖줄이기도 하다. 두 강물은 드넓은 호남평야를 적시고 서해바다로 빠진다. 호남평야는 동서 50km, 남북 80km의 타원형으로 이뤄졌다.

지금도 휴일이면 김제, 전주, 완주, 전국각지에서 온 많은 사람들이 온화한 모악산의 품에 안긴다.

아울러 호남 4경에는 변산의 여름경치, 내장산의 가을풍경, 백양사의 설경, 그리고 모악춘경이 꼽힌다. 모악산의 봄 풍경은 실로 빼어난데, 특히 봄에 피는 벚꽃은 장관이다.

모악산 아래에는 '금'자가 들어간 마을들이 많다. 그 중에 금산마을에는 금산교회가 있다. 미국 남장로회 전주 선교부의 테이트 선교사가 말을 타고 금산 일대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중 설립한 교회이다.

남녀가 유별하던 시절 'ㄱ자형'으로 아담하게 한옥으로 지어진 금산교회에는 '조덕삼 장로의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다.

지역 유지였던 조 장로는 가산의 일부를 팔아 다섯 칸짜리 한옥교회를 지었다. 건축이 있고 난 다음 해에 교회 장로를 선출하는 투표를 실시하게 됐는데, 모두의 예상을 깨고 조 장로 집의 종이었던 이자익이 장로로 선출됐다.

그 시대에 실로 충격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후에 장로가 된 조덕삼 장로는 "이 결정은 하나님의 뜻이다"라고 인정하고, 후에 이자익 장로가 신학공부를 하도록 적극 후원해 장로교 목사로까지 추대했다. 뒤에 이자익 목사는 소속된 교단의 총회장까지 지냈다고 전해진다.

한편, 이자익은 장로가 된 뒤에 선임 장로라고 조 장로 앞에서 한번도 선배임을 내세우지 않았고, 목사가 되기 전까지는 조 장로의 집에서 성실히 노비의 삶을 살았다 한다. 조덕삼 장로는 나중에 목사가 된 이자익 목사를 하나님의 종으로 여기고 살뜰히 섬겼다고 전해진다.

이런 미담의 주인공인 조덕삼 장로의 자녀 중에는 서울대 교수를 지낸 이도 나왔고, 정계 거물도 나왔으니 주일대사와 김대중 정부시절 당대표까지 지낸 고.조세형 대표가 바로 조 장로의 아들이다.

한국의 전통 건축양식과 서양식 교회의 특징을 조화롭게 결합시킨 금산교회는 초기 교회건축의 한국적 토착화 과정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건물로 전북문화재 136호로 지정돼있다. 지금도 건물의 원형은 물론 가구, 집기 등 각 구조물이 잘 보존돼 있으며, 한옥교회 옆에 새로 지어진 교회에선 꾸준히 신앙생활이 이어지고 있다.

이어 모악산 줄기를 타고 내려오다 보면, 국내 최대 사찰 중 하나인 금산사와 금산교회를 지나 원평저수지를 거쳐 발걸음이 원평장터에 다다른다.

원평집강소와 더불어 동학농민혁명사에서 의미있는 장소가 원평장터이다. 원평 시가지에서 전주방향으로 가다보면 옛 시장터가 나오는데, 이곳에 무려 1만여 명의 동학농민들이 모여 척양척왜를 외쳤다.

특히 원평장터는 전봉준의 주요 활동무대였으며,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하기에 앞서 고종의 특사를 처형시킨 상징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원평장터에서 천을 따라 모악산쪽으로 달리면 구미란 마을이 나온다. 이곳이 구미란 전투가 벌어진 곳인데, 동학농민군은 이 전투에서 일본군과 관군의 화력에 밀려 패퇴한다.

일본군에 패해 피신했다가 서울로 압송되는 전봉준을 시인 안도현은 이렇게 애달프게 추억했다.

 

    서울로 가는 전봉준

 

  눈 내리는 만경들 건너가네

  해진 짚신에 상투 하나 떠가네

  가는 길 그리운 이 아무도 없네

  녹두꽃 자지러지게 피면 돌아올거나

  울며 울지않으며 가는

  우리 봉준이

  풀잎들이 북향하여 일제히 성긴 머리를 푸네

 

  그 누가 알기나 하리

  처음에는 우리 모두 이름없는 들꽃이었더니

  들꽃 중에서도 저 하늘 보기 두려워

  그늘 깊은 땅속으로 젖은 발 내리고 싶어하던

  잔뿌리였더니

 

  그대 떠나기 전에 우리는

  목 쉰 그대의 칼집도 찾아주지 못하고

  조선 호랑이처럼 모여 울어 주지도 못하였네

  그보다도 더운 국밥 한 그릇 말아 주지 못하였네

  못다 한 그 사랑 원망이라도 하듯

  속절없이 눈발은 그치지 않고

  한 자세치 눈 쌓이는 소리까지 들려오나니

 

  그 누가 알기나 하리

  겨울이라 꽁꽁 숨어 우는 우리나라 풀뿌리들이

  입춘 경칩지나 수군거리며 봄바람 찾아오던

  수천 개의 푸른 기상나팔을 불어재낄 것을

  지금은 손발 묶인 저얼음장 강줄기가

  옥빛 대님을 홀연 풀어 헤치고

  서해로 출렁거리며 쳐들어갈 것을

  우리 성상계옵신 곳 가까이 가서

  녹두알 같은 눈물 흘리며 한 목숨 타오르겠네

  봉준이 이 사람아


/최병호기자·hoya0276
 


최병호 기자  cbh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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