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2학년 때 신라 수도 경주에 가서 천마총 등 여러 왕릉을 본 기억이 뚜렷하다. 그러다가 결혼 후 가족들과 함께 또 경주에 가서 왕릉이며, 불국사 등을 두루 살피며 고대사의 흔적을 느끼려고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 고향 전북에서도 고대사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장수와 남원을 근거로 한 소위 전북가야의 훌륭한 고분들을 발굴하고 가꿔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필자는 12월 2일 군산대학교 가야문화연구소가 주관하는 「백두대간 속  가야 이야기」답사에 참가해 전북가야 현장을 찾았다. 곽장근 교수가 인솔한 답사단은 먼저 장수가야인 반파국의 장계면 삼봉리 고분군을 둘러보았다. 타원형의 대형고분은 두 개가 붙어 있는 데 부부가 함께 묻힌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전북가야 고분이 그렇듯이 삼봉리 고분도 일제 강점기에 도굴돼 유물이 거의 나오지 않았다. 도쿠라세이지라는 일본인이 이 지역에 천막을 치고 대대적으로 도굴해 유물을 일본으로 빼돌렸다고 한다. 이 유물들은 일본 동경박물관에 있다고 하니 언젠가는 반드시 되찾아 와야 할 것이다. 

삼봉리 고분 유적지의 서쪽 산 능선 아래에 있는 고기리는 반파가야의 처음 궁성이 있었던 곳이다. 그러나 반파국은 철 생산으로 국력이 커지자 동쪽 능선 아래 탑동으로 궁성을 옮겼다. 두 곳 모두 풍수지리 상 명당이지만 탑동 자리가 더 크게 보인다. 답사단은 장수읍 동촌리 가야고분군 사적지로 자리를 옮겼다. 국가가 관리를 하기 때문인지 동촌리 고분군은 관리상태가 좋았다. 이 지역 고분의 피장자들은 지배계급이지만 최고통치자들은 아니라는 게 곽장근 교수의 설명이다. 답사단은 또 기문국이 있었던 남원 유곡리, 두락리 고분군을 찾았다. 이 지역 고분은 그 규모가 신라 왕릉보다 더 큰 것 같았다. 이곳도 도굴피해가 심해 8톤 대형트럭으로 10여 대 분의 유물이 실려 나갔다고 한다. 참으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반파국과 기문국 등 전북가야는 4세기 후반에서 6세기 전반기까지 150여 년 동안 무주, 진안, 장수, 임실, 남원 등 3백여 리를 강역으로 했다. 철을 바탕으로 백제와 자웅을 겨루다 결국 521년에 백제에 종속된 나라이다. 답사단이 찾은 고분을 중심으로 가야고분이 계속 이어지는 데 반파국 240개, 기문국 180개 등 420개의 고분이 확인되고 있다. 또한 삼봉리 고분에서 목곽분의 꺽쇠가 가야지역에서는 유일하게 출토돼 피장자의 신분이 최고통치자임을 증명한다. 

반파국과 기문국은 철의 왕국이었다. 두 나라가 철의 왕국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전북혁신도시에 자리 잡은 철기문화가 원료가 풍부한 동부산악지대로 전파되면서 꽃을 피웠기 때문이다. 전북가야의 철은 니켈 성분이 많아 최고 등급으로 평가받았다. 전북가야는 철을 다른 가야국 뿐 아니라 중국 등에 수출하고 대신 토기와 구리거울, 오색옥 등을 수입했다. 고분에서는 이러한 유물 뿐 아니다 말발굽을 보호하는 편자와 금동신발, 큰 칼, 철제초두 등 당대의 최고 명품들이 출토되고 있다. 또한 반파국은 백제와 전쟁을 벌이며 8갈래의 봉화를 운영한 봉화의 왕국이기도 했다.

곽장근 교수는 온갖 고초를 겪으며 30여 년 동안 전북 동부지역을 찾아다니고 반파국과 기문국의 존재를 고고학적으로 밝혀냈다. 곽장근 교수는 송하진 지사의 지원으로 고대사 정립을 완성하게 됐다고 한다. 고대사는 삼국시대가 아니라 사국시대로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남원 유곡리, 두락리 고분군을 중심으로 세계문화유산 등재도 성공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아울러 삼봉리 고분처럼 발굴 작업이 진행되는 곳에는 돔을 설치해 살아 있는 역사 현장 교육에도 활용하는 방안이 추진돼야 할 것이다. 8갈래의 봉화가 반파국의 왕도 장계면으로 집결되는 장면을 축제로 승화시키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외국인 학자들도 찬사를 보내며 세계적 관광지로 발전시켜나갈 것을 권고하고 있다. 전북은 이처럼 가야왕도로 거듭 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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