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격변 속에서도 선비정신 지키다

<(10) 유재 송기면>역사적 격변 속에서도 선비정신을 지키다 단발과 창씨개명 거부해 갖은 고초 겪기도 전라일보l승인2021.12.30l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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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무력을 앞세워 1905년 을사늑약을 체결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아 갔다. 이후 차례로 군대를 해산시키고 사법권과 경찰권까지 박탈시킨 뒤 1910년 한일합병(韓日合倂)을 자행한다. 일제가 단발과 창씨개명으로 민족정신을 말살하려 혈안일 때, 칼을 들고 머리를 깎으려는 순사들에게 오히려 호통을 치던 이가 있다. 그는 유재 송기면(裕齋 宋基冕)으로 광복을 맞이하는 순간까지도 단발과 창씨개명을 거부하며 일제에 저항했다.

유재는 근대 유학자이자 서화가로 1882년(고종 19) 김제시 백산면에 있는 요교마을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여산(礪山)으로 자는 군장(君章), 호는 유재이다.
9세부터 큰 스승 없이 글공부를 시작했다. 1895년 13세의 나이로 같은 마을에 살던 석정 이정직(石亭 李定稷)의 문하에서 공부하게 된다. 석정에게 학문을 청하기 위해 관선당(觀善堂)이라는 강사(講舍) 한 채를 마련하기도 했다.

석정은 전북 문인화의 출발점이자 선비 서화가의 본보기였다. 옛사람의 글씨를 익히고 전수하기 위해 법첩(法帖) 등을 만들어 제자들에게 수없이 임서(臨書)하게 했다. 유재 역시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수련했다. 10여 년 동안 석정을 스승으로 모시며 서화를 비롯해 시문, 천문, 역산(曆算) 등을 두루 배운다.

학문을 쌓으며 경륜(徑輪)에 뜻을 두게 됐다. 1906년, 유재의 나이 25세에 조정에서 박사과(博士科)를 실시한다는 소식을 듣는다. 하지만 당시 시험장이 문란하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시험을 포기한다. 이후 1910년 석정이 타계하고 한일합병이 되자 경륜의 꿈을 버리고 석정의 뒤를 이어 후학을 지도한다.

1920년을 전후하여 부안 계화도에 있던 간재 전우에게 나아가게 된다. 간재는 율곡(栗谷)에서 우암(尤庵)으로 이어지는 기호학파(畿湖學派)를 계승한 유학자로서 일제의 국권 침탈에 맞서 성리학의 학맥을 지키고자 했다. 간재는 평생을 성리학 이념을 지키며 살았는데 일제는 물론이고 서양의 문물까지도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유재는 이러한 전우의 학풍을 계승하여 학문적 기반을 다졌다. 고향인 김제에서 요교정사(蓼橋精舍)를 짓고 후학양성과 학문연구에 전념한다. 요교정사는 전북의 서예문화와 선비정신이 담긴 상징적 공간으로 지난해 김제시 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유재는 역사적 격변 속에서도 유학자로서의 선비 정신을 고수했다. 그의 선비 정신은 오롯이 작품 속에 담겨 있다. 간재는 그의 글씨를 보고 완곡하면서도 쇠로 만든 밧줄같이 힘이 있다며 ‘은구철삭(銀鉤鐵索)’이라고 평가했다.
현재까지도 적지 않은 숫자의 작품들이 남아 있는데 편액으로는 관선당과 부안에 위치한 간재의 사당인 계양사가 있다. 고려 말 평장사 문정공 김구를 중시조로 모신 부안김씨 재실인 경지재의 주련(柱聯)을 쓰기도 했다.

유재의 행·초서 병풍은 전주 한옥마을에 위치한 강암서예관에서 볼 수 있다. 병풍에 대해 김병기 전북대 명예교수는 “보통 서예에 사용되는 양모필이 아니라 노루 털로 만든 장액필(獐腋筆)로 쓴 것”이라며 “장액필은 양모필에 비해 가늘고 부드럽기 때문에 붓을 다루기가 어려움에도 글씨가 매우 힘있고 탄력이 있어 높게 평가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서양문물이 범람하던 시대에서 한국 서예 전통을 지킨 20세기 최고의 서예가라고도 덧붙였다.
유재의 학문과 서예의 맥은 그의 장자인 소정 송수용과 계자인 강암 송성용으로 이어졌다.

/임다연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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