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을 대표하는 곳은 많지만, 군산시민이 가장 좋아하고 어린 시절의 추억이 많은 곳은 단연 ‘월명공원’이라고 한다.
월명(月明)이라는 지명은 월명공원이 위치한 월명산에서 유래했으며 조선 후기 고문헌과 고지도에서는 관련한 명칭을 찾을 수는 없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지은 이름이라는 것이 정설인 듯하다.

월명공원은 군산을 대표하는 공원으로 군산 시내와 금강하구 사이에 월명산, 장계산, 장방산 등 낮은 산자락이 있다. 이 산자락을 공원으로 조성한 곳이 바로 월명공원이다. 벚나무가 많아서 봄에는 벚꽃이 아름답게 만발해 군산에서 벚꽃 촬영의 명소로 꼽을 수 있는 대표적인 곳이기도 하다.

월명공원에는 유난히 기념비와 기념탑이 많다. 수시탑, 삼일운동기념비, 채만식 문인비, 개항기념탑 등이 있는데 이중 가장 유명한 조형물은 수시탑이다. 수시탑은 지난 1966년에 세운 탑으로 군산의 부흥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세운 탑이다. 수시탑은 형태가 아주 독특한데 타오르는 불꽃 모양이라는 말도 있고 바람에 날리는 돛의 형태라는 말도 있다.

월명산은 산책로가 잘 조성돼 있어 길게 이어지는 산책로를 따라 걷다 보면 넓게 트인 서해를 한눈에 들여다볼 수 있다. 어린 시절의 추억이 담겨있는 비둘기 집과 바다 풍경을 즐기며 가벼운 산책을 할 수 있는 월명공원은 군산시민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는 곳이다.

산책로를 걷다 보면 시끌벅적 한 흥이 나는 뽕짝 음악이 넘쳐나는 공원매점을 만날 수 있는데 군산사람이라면 이곳에서 아이스크림 한번 먹지 않은 사람은 없다.
이곳에서는 비둘기 모이를 뿌리며 달리는 해맑은 모습의 아이와 필름카메라의 찰칵 소리는 추억의 향수를 부르고 그런 모습들은 군산에 사는 사람이라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갈 것이다.

하지만 현재 매점 문은 닫혀있고 주변은 아주 고요하며 그 많던 비둘기 떼는 다들 어디로 갔는지 모습이 더 보이지 않는다.
월명공원 계단을 내려오다 보면 흥천사라는 곳을 마주할 수 있으며 동국사, 은적사 등 역사 깊은 사찰들이 곳곳에 만나볼 수 있다.

월명공원 아래에는 일제강점기 때 전라도의 쌀을 좀 더 쉽게 일본으로 가져가기 위해 군산 내항과 시내를 연결하려고 1926년에 만든 반원형의 터널인 ‘해망굴’을 만날 수 있다.
해망굴은 높이 4.5미터, 길이 130미터의 긴 터널로 현재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184호에 지정돼 군산시에서 관리하고 있다.

해망굴의 입구는 석축으로 만들어졌고 안쪽은 콘크리트로 만들어져 있다. 일제강점기 수탈의 아픔을 간직한 곳으로 기억되지만, 워낙 튼튼하게 만들어져 한국전쟁 당시에는 인민군의 지위소가 자리했다고 하며 입구 주변에는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비행기가 쏜 총탄의 흔적이 남아있다.

해망굴은 일본이 수탈을 위해 내항과 시내 사이에 뚫은 터널이다. 일제강점기 때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살 수 없고 일본인만 거주할 수 있던 장미동을 비롯해 신흥동과 마주하고 있다. 우리 민족은 이 같은 일본인 거주지에서 함께 살지 못하고 살기 험한 산비탈로 쫓겨 가 겨우 초근목피로 연명하는 수준으로 살아야 했다. 이곳에 모여 사는 우리 민초들의 애환을 고스란히 담은 또 다른 곳이 있다. 해망굴을 지나 월명산 자락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비탈길 달동네 해망동 마을이다.

‘해방촌’으로도 불리던 해망동 마을은 주변에 일제강점기 쌀 수탈을 위해 일본인들이 만든 많은 창고가 남아있던 곳이기도 하다. 이 창고들이 피난민들의 수용소로 사용되면서 해망동 일대는 이들의 집단 거주지가 됐다. 이곳에 세워진 ‘망향비’에는 아래와 같은 글이 소개되고 있다.
“해망동 마을은 월명산 북쪽에 자리한 마을로 금강의 물줄기가 바다와 만나는 지점에 있다. 1930년대 초 일본인들이 해망정으로 칭했다가 해방 이후 해망동으로 개칭됐다. 망향비 인근 지역은 1.4후퇴 때 피난 온 황해도 실향민과 군산내항 호황으로 이주해 온 전라남도 지역민들, 1950~70년대까지 목재, 냉동, 수산물가공 공장 직원들이 정붙이고 살았던 곳으로 군산 근현대사의 애환이 담긴 산동네였다.”
망향비(2018년12월30일)는 동백대교 건설과 자연재해 위험지구로 지정되고 달동네가 철거되면서 정든 집을 떠나는 분들의 애틋한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김영신 군산시청 학예사는 해망동 마을을 이렇게 소개한다. 해망(海望)동은 바다를 바라본다. 그래서 바다 해에 바라볼 망, 해망굴을 지나면 해망동이 나온다. 조선 시대 후기에 해망굴 위에 해망정이라는 정자가 있다는 기록이 있다. 따라서 예전부터 해망이라는 마을이 자리 잡고 있었다. 여기는 또 1951년 1.4후퇴 때 황해도에서 피난을 왔던 5만여 명의 난민들이 천막을 치고 임시로 정착했던 곳이기도 하다. 당시 이곳의 많은 주민 가운데 대부분이 피난민들이었고 삶의 터전이 됐던 공간이다. 피난민들의 생계는 대부분 어업을 중심으로 삶을 이어갔으며, 어업 활동은 선주나 연근해 어업을 하는 부자도 있었지만 대부분 갯벌에서 조개 등을 깨는 맨손어업에 종사했다.

5만여 명에 이르는 황해도 피난민 가운데 2만5,000여 명만 군산에 정착하고 나머지는 김제와 부안, 익산 등으로 배치됐다고 한다.
초기 피난민들에게는 주로 단체로 수용됐는데 쌀을 가족 단위로 배급해주던 해망동 ‘솔곳’이라는 수용소, 부녀자와 어린이만을 수용하여 공동 배식을 하던 구암초등학교 난민 수용소, 중앙초등학교 등으로 구분해 수용했다. 이 가운데 일부는 월명산 산비탈과 공설운동장 계단을 바람막이로 움막을 짓고 지내기도 했다.
군산에 터전을 잡은 피난민들은 초기에는 해망동을 중심으로 인근 소룡동과 장미동, 금동, 금광동, 오룡동, 신흥동, 선양동, 개복동 등 군산 중심지 주변으로 흩어져 살았다.

많은 피난민의 영향으로 해망굴 인근 군산서초등학교에는 한 학년 학생이 250~300명이 넘을 정도였다고 한다. 지금은 학생 수가 줄어 20여 명 안팎이다.
해망동 마을 주민들에게는 고단한 삶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마을 앞에는 우리나라 대표 목재회사 가운데 하나였던 ‘청구목재’가 자리하고 있어서 1,000여 명의 주민들이 취업을 통해 충족한 생활을 누리기도 했다고 들려주고 있다. 여기에 어족이 풍부해 잦은 풍어로 만선의 기쁨을 느끼기도 했단다.

지금은 동백대교(2008~2018), 자연재해 위험지구 지정(2005~2014)으로 모두 철거되고 ‘해망 자연마당’ 공원으로 조성됐다. 해망 자연마당에는 습지, 개울, 다양한 생물 서식처, 외래수종이 없는 생태숲, 지역의 역사 알림판 등으로 조성돼 지역민의 삶의 애환을 재현하기 위해 주거지 상징물, 우물 복원 등 철거민들의 스토리를 입혀 과거와 현재를 만나 볼 수 있다.

수많은 애환을 간직한 채 최근까지 평생을 지켜온 이곳 마을 상당수 주민은 백발의 노인이 돼 인근 지역과 보금자리주택으로 이주해 노년을 이어가고 있다.
/최병호기자·hoya0276@
/강경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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