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숫대야 받들어라 작은 주방 지키면서
요지 향해 무릎 꿇고 주장을 올리누나
내가 만나뵈도 오히려 피할세라
일생동안 한 번도 군왕을 못 뵙는걸”

조선조 문장가 허균의 시 ‘궁사’ 중 한 수다. 허균은 벼슬에서 물러나 요양하다 은퇴한 늙은 궁녀를 만났다. 이 자리에서 궁녀들의 애환에 대해 자세한 이야기를 들은 허균은 궁중의 일을 100수의 시로 파노라마처럼 펼쳤다.  위 시에서 궁녀는 왕의 잔심부름을 하며 일생동안 살았음에도 한 번도 왕을 정면으로 대하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탄식하고 있다.

궁녀제도는 원래 고대 중국에서부터 있었는데 조선조 역시 그 제도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대략 궁궐 내에는 약 700여 명의 궁녀들이 근무했다고 한다. 이 중 200여 명은 그나마 품계가 있는 정식 관원 대우를 받았다. 나머지 500여 명은 그저 노비나 다름없었다. 궁녀 중에서 승은을 입어 왕의 후궁이 되는 자는 극소수였고 대부분 자유를 빼앗긴 채 고단한 노동에 시달렸다. 왕의 얼굴조차 보지 못하고 무늬만 ‘왕의 여자’로 일생을 마쳤다.

영화나 드라마가 다루는 궁녀는 이런 현실과는 동떨어진 내용들이 많다. 대부분 왕의 총애와 후계를 둘러싼 음모를 그리는데 사실 대부분 궁녀들에게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었다. 그나마 대중들에게 잘 알려진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나 정조의 후궁 의빈 성씨 등이 궁녀로서 왕의 여자가 되고 세자까지 낳은 희귀한 사례다.

최근 인기리에 막을 내린 TV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은 바로 의빈 성씨 이야기다. 한미한 집안에서 태어난 의빈 성씨는 정읍 태인이 고향이다. 부모가 돌아가시고 고아로 살다가 궁녀성덕임이 된 뒤 정조가 총애하는 후궁의 자리에 올랐다. 그런데 이 드라마에서 주목할 점은 그녀가 당당하게 전문직으로서 궁녀 소임을 다하는 것으로 그려진다는 것이다. 신분의 제약을 딛고 적극적이고 활기차게 자신의 삶을 꾸려간다. 오늘날 시각으로 보면 전문직 여성의 전형이다. 비평가들은 이런 점이 높은 시청률을 기록한 원동력이라고 보는 모양이다.

물론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는 상상력의 발휘에 더 무게가 실린다. 신분제도가 공고하던 그 옛날이야기가 오늘날 각광을 받는 것은 새로운 신분사회에 대한 분노 때문이라는 생각이다. 흙수저, 금수저론이 지금의 세태를 웅변한다. 궁녀 성덕임은 흙수저 출신이지만 결코 좌절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개척한 청년이다. 좋은 본보기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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