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희 예원예술대학교교수

황극단(皇極壇)은 고종황제와 독립운동가들을 모신 곳이다. 원형의 단으로 전주 어린이 회관 부근에 있다. 한가운데 고종황제의 비가 있고, 빙 둘러서 임실출신 의병장 이석용 순국비, 백범 김구선생비, 순국 5열사비(안중근, 이봉창, 윤봉길, 이준, 백정기), 3.1 만세운동 대표 33인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이 5개의 비 둘레에 돌기둥으로 원형의 울타리를 둘렀다.  

황극단은 조선말 임실출신의 의병장 이석용의 아들 이원영이 건립한 것이다. 이석용은  1907년 진안 마이산에서 ‘호남의병창의단’을 결성하고 의병을 일으켰다. 임실 성수면 소충사(昭忠祠)는 이석용과 그를 따른 28의사를 모신 사우이자 기념관이다. 소충사 휘호는 이승만대통령이 쓴 것이다.

이석용은 일제에 붙잡혀 1914년 대구형무소에서 교수형을 받고 37세의 젊은 나이에 순국하였다. 그러면서 아들 이원영에게 조선왕실의 근본지지(根本之地)인 전주에 황극단을 세울 것을 유언하였다. 이에 이원영이 광복후 8년간 행상을 하며 돈을 모으고, 2,600평의 전답을 매각해 세운 것이 황극단이다.

이원영도 순국지사들의 제사를 지내는 등 일제에 저항하여 2년 6개월의 옥고를 치른 독립운동가이다. 이석용과 이원영은 전주이씨로 광복후 부자간에 독립지사로 서훈되었다. 황극단은 이런 각별한 의미와 사연을 지닌 곳이다.

근래 황극단을 다시 생각하게 된 것은 작년 11월말 전주정신 꽃심 포럼 때이다. 포럼 주제가 ‘장소로 본 전주정신’이었고 여기에서 필자는 ‘전주정신 올곧음을 담은 역사적 장소와 그 의미’라는 주제로 발표하였다.

이 글에서 올곧음의 역사적 장소의 하나로 황극단을 소개하였다. 이석용부자가 전주사람들이 아닌데 전주정신의 장소로 적절할까 하는 의문이 있었지만, 전주에 자리하고 있고, 전주에 건립한 이유가 조선왕실 근본의 땅이라는 점이었으므로 황극단을 택하였다.

이 발표를 통해 황극단에 새롭게 주목한 것은 김기현교수님의 토론을 들으면서이다. 한국유학을 전공한 김교수님은 황극이 『서경』에 나오는 말로 ‘통치자가 훌륭한 정치의 도리를 정립한다[皇建其有極]’는 의미이지만, 정치적 의미를 떠나서 커다란[皇] 중심[표준: 極]을 세운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황극은 지극한 중심, 우주의 대동맥 같은 의미로, 황극단 건립은 전주에 지극한 중심을 세우겠다는 뜻을 가질 수 있으며, 그런 점에서 황극단은 전주정신 “꽃심”과 상통하는 부분이 있을 수 있다고 김교수님은 토론에 덧붙였다. 필자는 황극에 이런 의미가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전주정신 “꽃심”은 전주가 새로운 문화와 세상을 창출해 가는 중심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꽃심을 영어로 번역할 때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세상의 중심 ‘옴파로스’라고 하였다. 포럼 토론을 듣고 황극단이 곧 전주정신 꽃심의 상징적 장소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존재가 또 새롭게 다가왔다.
황극단은 1955년 처음 건립될 때 전북대 부지에 위치했다. 1978년 전북대를 확장하면서 전북대 기숙사 뒤편, 송천동에서 전북대로 넘어오는 대로변 우측(어린이회관으로 꺽어지는 길 맞은편)으로 이전되었다. 지금은 또 어린이회관 안쪽 보훈시설 부지로 이건되어 마무리 중이다.

황극단이 이곳저곳 옮겨 다니는 것에 아쉬움이 있다. 오래전의 일이지만 전북대에 그대로 두고 있었다면 대학의 큰 상징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황극단은 2003년 국가보훈처 현충시설로 지정되었고, 매년 5월 5일 추모제를 거행한다.
황극단은 그 가치로 볼 때 전북도의 등록문화재 지정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건이 잘 마무리되고 문화재로 지정되어 그 정신이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될 수 있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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