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 공음면 구암리는 마을에 거북처럼 생긴 바위가 있어 구암(龜岩)이라 했다. 1600년대에 경주최씨(慶州崔氏)가 마을 타고 지나다 주점에서 하룻밤을 묵는데 그 날 밤 선몽을 받아 터를 잡고 살기 시작하면서 마을이 이루러졌다고 전해진다.

본래 무장군(武長郡) 동음치면(冬音峙面) 지역으로 지난 1941년 3월 조선총독부령 제11호에 따라 덕음리, 구수리, 장동리, 성재리, 다옥리의 각 일부와 하리면(下里面) 택동리와 영광군 홍농면 덕림리 일부가 병합되어 구암리가 되었고 공음면에 편입됐다. 장동, 마래, 다옥, 구수 4개의 행정리외 장동, 이심동, 마래, 성재동, 다옥, 구격, 용흥, 구수 등 8개의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구수마을은 동학농민혁명 당시 전봉준 등 동학농민군이 지역단위 민란에서 전국단위의 봉기로 전환되는 시발점이 되는 포고문을 발표한 지역으로 동학농민혁명 기포지로서의 의미가 있다.

구암리의 자연환경은 전체적으로 평지를 이루고 있으나 동쪽에는 얕은 산들이 있다. 두암저수지에서 시작되는 구암천이 서쪽에 있고 중앙에 장동천이 있다. 공음면 북서쪽에 있는 구암리는 2021년 11월 현재 면적은 4.21km이며 경지면적은 2.31km로 밭 0.95km, 논 1.36km, 임야 1.26km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동쪽으로는 206.4m 무명산, 서쪽으로는 홍농읍 덕림산이 위치한다. 남쪽으로는 공음면 석교리, 칠암리, 북쪽에는 상하면 용대리, 공음면 두암리와 경계한다. 석교천은 공음면 구암리 일대에서 발원하여 서해로 흘러가는 하천이다. 두암저수지 일대에서 두암천에 합류해 남쪽으로 흐른다, 석교리의 장촌마을에서 남서쪽으로 방향을 바꾼 후 칠암천에 합류하고 전남 영광군 법성면으로 접어들어 홍농읍과 경계를 이루며 서해로 들어간다.

구암리 마래(馬來)마을은 면소재지에서 북쪽으로 4km 거리에 위치하며 1600년대에 경주최씨(마래 중시조)가 말을 타고 이곳을 지나가다가 주막에서 하룻밤을 자다가 선몽을 꾸고 터를 잡아 형성된 마을이다. 경주최씨 최문세는 고운 최치원의 24세손으로 1655년 장성군 황룡면에 살다가 마래로 들어와 집성촌을 이루고 현재까지 12대를 이어오고 있다.

마래는 4개의 자연마을로 나우어져 있다. 현재 마을주민 대부분이 살고 있는 마을회관 근처는 ‘새터’이며, 그 뒤쪽 두암리 쪽이 ‘번둥’이다. 마래주유소 뒤편은 영광군에 속해 있어 ‘영광똥’이라고 하고 삼효각 건너편은 큰 마을이 있어 ‘큰물’이라고 한다. 삼효각은 ‘영광똥’에 위치하고 있어 향정구역이야 어찌됐던 마을주민은 ‘영광똥’까지 마래로 인식하고 있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 역시 스스로를 마래사람이라고 말한다.

삼효각 관리는 여전히 마래 경주최씨들이 맡아서 관리하고 있지만 문화재 등록이 안 돼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 자신들의 할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그들 또한 자신들의 조상을 위해 마땅히 해야할 일로 인식하고 지금도 조상을 섬기는 마음이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구수(九水)마을은 면소재지에서 서북쪽으로 3km 거리에 위치하고 1700년대 중반에 형성된 마을이다. 저수시설이 없을 때 물을 흘러 이 물을 이용해 농사를 지었다고 구시내로 부르다가 구수로 개칭했다. 마을 앞에 큰 당산나무가 있었다고 하여 ‘당산(堂山)’ 또는 ‘당뫼’로도 불렸다.

특히 구수마을은 동학농민혁명 당시 전봉준 등 동학농민군이 지역단위 민란에서 전국단위 봉기로 전환되는 시발점이 되는 포고문을 발표한 곳으로 동학농민혁명 무장기포지(당시 무장현 동음치면)로서 의미가 있다. 마을 앞에는 무장기포기념공원이 조성돼 있다.

구암리의 문화유산으로는 삼효각(三孝閣), 동학농민혁명 무장기포지, 구암리 고인돌이 있다, 마래 삼거리에 있는 삼효각은 경주최씨 집안의 3대째 이어온 효행을 기리고 널리 알리어 후세 사람들이 이를 본받도록 하기 위해 1916년 후손들이 건립한 것이다. 삼효각 안에는 삼효비가 세워져 있는데 경주최씨 27세손 농암공(農庵公) 최정과 28세손 단암공 최처운, 29세손 두운공 최봉지가 비석의 주인공들이다. 비문은 행주(幸州) 기우만이 지었고 글씨는 김해(金海) 김용훈이 썼다.

농암공은 아버지의 병환이 깊어지자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3일이나 연명하게 했는데 그 효심이 널리 알려져 유림의 추천으로 상을 받았다. 농암공의 아들인 단암공은 아버지를 본받아 효심이 지극했으며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3년 동안 시묘를 살았다고 한다. 단암공의 아들인 두은공 역시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효행이 극진했다고 한다.

동학농민혁명 무장기포지는 1894년 1월 고부민란 이후 안핵사 이용태가 고부에서 농민군 가담자를 가혹하게 다루자 전봉준은 일단 무리들을 해상하여 3월13일 부하 50여명만을 거느리고 무장으로 내려온다. 당시 호남의 최대 세력을 떨치던 무장의 손화중 등과 힘을 합하여 세상을 바로잡고 왜놈을 물리친다는 것을 요체로 1894년 3월20일 무장현 동음치면 당산에서 포고문을 발포하고 행동지침을 포괄하는 4대 명의를 발표했다. 전봉준 등 지도부가 밝힌 거사의 대의명분은 이때 발표된 ‘무장창의문’에 잘 나타나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등 동학농민혁명을 이끌었던 사람들만 기억해 왔지만 이들 세 명에 의해 주도가 되었다고 할지라고 이들과 함께 했던 다수의 민중이 있었기에 농민혁명이 가능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이름 없는 농민군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대답은 “우리가 알고 있는 이는 많지 않다”이다. 먼저 구수마을에서는 송총의 주인이었던 송문수와 더불어 농민군 고창주가 있었다. 고창주(1858-1895)는 무장현 동음치면 당산리(현 구수마을)출신으로 1894년 당시 열다섯 살이던 어린 아들 고광철과 함께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다. 그는 아들과 함께 황토현 전투, 장성 황룡천 전투, 전주성 전투 등에 참전했다. 2차 농민봉기에 참여했다가 지도급 인물과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된 후 1895년 3월 3일 재판을 받고 무죄선고를 받아 풀어났으나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 정읍에서 다시 체포되어 1895년 3월 27일 지방관원에 의해 처형됐다. 이후 1994년 5월, 그이 행적을 기록한 비석이 무장기포지에 있는 모정 옆에 세워졌다.

이 마을에는 지금은 없어졌지만 큰 팽나무인 당산나무가 있어 당산마을이라 불렀고 아직도 마을사람들은 구수마을보다 당산마을이라는 이름을 즐겨 쓰고 있다.

무장기포는 지역봉기인 민란에서 전국적인 봉기로 출발한 시점으로서 동학농민혁명사에 중요한 역사적 의의가 있다. 무장기포지는 1994년 동학농민혁명 100주년 기념사업 일환으로 공음면 주민들이 1백여만 원을 모아 공음면 구암리 589-3번지외 2필지, 고창군에서 매입한 구암리 590번지 일대를 포함해 조성됐다.

구암리 고인돌은 함양오씨 묘역 내에 있다. 고인돌 상석은 장방형의 형태를 띠고 있고 서남쪽 경사면을 따라 기울어져 있다. 지석이 없는 개석식으로 고인돌의 장축은 동쪽에 있는 산줄기와 방향이 일치하게 남북방향으로 두고 있으며 크기는 장축 297cm, 단축 198cm, 두께 92cm 내외이다.

/고창=신동일기자·sd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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