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농은마을의 역사와 문화

하나의 오래된 마을을 조사하기 위해서는 기초자료가 필요하다. 마을의 역사를 알기 위해서는 오래된 지도를 통하여 예전에 어떻게 마을 지명이나 수로가 변했는가를 살피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마을조사에서 또 하나 그 마을의 오래된 동네 우물 조사 그리고 나중에 문헌 조사순으로 진행하면서 그 마을의 특징을 잡아내는 순으로 해 보고자 한다.
지금의 호성동 농은마을 주변은 1872년 규장각지도에서 조선시대 초곡면에 속했다. 초곡면은 노란색으로 표시하였는데, 건지산의 줄기가 동쪽 소양천으로 뻗은 부근에 초포가 예전부터 있었으며 초곡면이라 불리웠다. 소양천을 두고 초곡면 맞은 편에는 용진면이 있어 간중리, 상운리, 용암리, 용교리, 도계리, 효천리, 상삼리 등이 있었다. 
초포라는 지명은 소양천과 깊은 관련이 있으며 전주의 완산팔경의 하나인 동포귀범과 상당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초포는 현 전주역 부근인 장재리(장재동), 다경리, 중오리, 농은리 지역으로 소양천을 따라 소금배가 들어왔던 지역이다.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 장재동은 지우산을 만들었던 마을로 윗장재동과 아랫장재동으로 나누어 졌다. 윗장재동은 현재 전주역이 되었고 마을이 작은 아랫장재동은 현재도 그대로 남아 있다. 다경리는 방죽안이라고 불렀으며, 중오리는 신중리 서남쪽에 있는 마을인데 중어리로도 불렸다. 특히 농은리는 호성동의 중심마을로 소양천을 벗하면서 살아가는 전형적인 농촌마을이었다. 
고대인들은 산길을 통해서 문화가 전달되기도 하지만, 대부분 물길을 따라 문화가 들어오는 경우가 많았다. 청동기시대에는 물길을 따라 문화가 유입되는데 이들은 벼농사를 짓고 토기를 만들었다. 주로 오산마을에는 거대한 고인돌이 산등성과 논·밭에 위치하고 있으며, 또 자라바위 등어리에는 하늘의 별자리를 새겨 넣기도 하였다. 
봉암리는 부엉이처럼 생긴 바위가 있었다고 전하며, 오매에는 자라처럼 생긴 바위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들이다. 초당 마을에는 영조 때 효행이 지극한 강서린이라는 효자가 있어 지행당이라는 집을 지어 주었고, 한사월과 농은리에는 세조의 아들 덕원군(德源君) 서(曙) 증손인 호성군 이주의 후손들이 거주하고 있으며 이들의 땅은 호성군 이주에게 국가로부터 직접 사패지로 받은 땅이다. 

? 만경강 범선(완산 팔경)

소양천을 따라가면 배미실이라 부르는 곳이 있는데, 이곳은 사실 옛날 배를 매는 곳이라 붙여진 곳이다. 바로 이 지역이 전주로 들어가는 물자를 수송하는 중요한 물류센터였고, 이곳에는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면서 주점들도 형성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 소양천 지역

일제강점기 지도를 살펴보면 이곳 만경강 소양천에는 많은 범선이 등장하고 있다. 완산팔경에는 동포귀범(東浦歸帆)이 있는데 이곳이 바로 초포지역 배미실 지역일 것으로 추정한다. 이 사진을 가지고 현장을 조사해 보니 저 멀리 산 능성은 소양천의 반대편에 있는 용진면 구억리 산성이 있는 지역에 해당된다.
 이 범선(帆船)은 엄청난 크기의 돛을 달고 바람을 이용하여 항해를 하는 특징이 있다. 범선은 바다를 나가기도 하지만 폭이 작기 때문에 강을 거슬러 올라다니면서 물건을 나르거나 파는 용도로 쓰인다.

? 일제강점기 농은마을 지도

농은마을은 일제강점기(1935년) 완주군 초포면에 들어가게 된다. 즉 봉암리의 자연마을에 해당된다. 여기서 물길과 도로가 만나는 정주리(丁舟里)라 표시된 곳이 있는데, 이곳이 원래는 배미실로 정주(停舟)라 표시해야 하는데, 일제 시대는 지역 정체성을 없애기 위하여 한문을 원래대로 쓰지 않고 간략하게 쓰고 있는 것이다. 

?  호성동 농은리 봉암리 한사월(한촌) 화정리 일부

이후 1957년 11월 6일 법률 제 453호에 의하여 완주군의 신성, 봉암, 송전 3개의 리가 전주시에 편입이 된다. 그리고 1957년 12월 12일 전주시 조례에 제 108호에 의하여 신성리는 호성동 1가, 봉암리는 호성동 2가로, 송전리는 호성동 3가로 하였다가, 1973년 7월 1일 대통령령 제 6542호에 의하여 호성동 1가, 2가, 3가를 모두 통합하여 호성동으로 부르게 되었다. 즉 농은마을은 호성동 2가에 속했다가 현재는 호성동 농은마을에 해당 된다.

?  정의대부 호성군 이주의 교지(만력 22년: 1594) 

호성동에는 우리 조선을 지킨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호성군 이주이다. 호성군(湖城君) 이주(李柱)장군은 임진왜란 시절 직접 전쟁에서 부하들을 독려하며 일선에서 전투를 지휘했으며, 때로는 의병을 모집하고자 임실과 전주지역을 돌아다니며 온 힘을 기울였다. 
호성군 이주는 시조이신 이한공의 28대손이며 세조대왕의 고손으로 1562년 임천군의 둘째 아들로 귀하게 태어났다. 13세부터 중봉 조헌(趙憲)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수학하였고, 시국이 어수선하여 국내외 정세가 앞으로 왜적이 침입할 것을 예견하고 있었기에, 읽던 경서를 덮어두고 평안도 법흥사를 찾아가 이곳에서 무술연마와 병서를 읽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주에 내려와 가산(家産)을 정리하여 군자금을 마련하여, 종제(從弟) 흥원군, 춘원정, 재종 명성군과 창의할 것을 다짐 후 전주와 임실 등에서 3차에 걸쳐 3천여 명의 의병을 모집하여 의주 행재소에 의병장으로는 최초로 찾아가 중신들이 모인 자리에서 선조임금을 배알(拜謁)하고 그 자리에서 선조와 문답하고 호위하였다. 
선조 임금이 환도할 때 호종하여 돌아왔으나 수차례의 격전으로 피로가 쌓였던지 환도 한지 이듬해인 1594년 서거하니 선조께서 소식을 듣고 3일간 조회를 피하고 양주에 예장하였다. 이후 32년이 지난 1625년에 농은마을 동쪽인 완주군 용진면 상운리 행지산 임좌로 이장하였고, 후손 형진이 묘소 앞에 행지정사를 단독으로 건립하였다.
 1604년에 정의대부 호성군에게 선무원종공신을 책훈하고 다음 해 철권과 록권 및 사패지를 하사하였다. 이런 사실로 행정구역 개편시 호성군이 살던 지역을 호성동으로 명명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호성군의 정신을 잇고자 동명도 정했는데 사실 호성군 이주를 아는 사람은 매우 적다. 
호성군은 의병장으로 적진에 뛰어들어 지략과 용맹을 떨쳐 왜적들로부터 비장군(飛將軍)이란 칭호를 들었다 한다. 이러한 충(忠)의 대명사인 호성군에 대하여 행지산에 있는 신도비와 행지재사 그리고 농은마을에 있는 사패지와 그의 유물을 보관했던 한사월 영모당 등이 있다. 

호성군 이주의 신도비는 전주에서 봉동 가는 도로변 용진면 간중리 입구에서 300여m 전방 좌측 전주이씨 선산에 있다.
 방형대석(方形臺石)에 옥개형(屋蓋形)개석을 갖추고 있으며 1832년에 건립되었으며, 가선대부사헌부대사헌겸성균관제주시강원찬선세손사(嘉善大夫司憲府大司憲兼成均館祭酒侍講院贊善世孫師) 은진(恩津) 송치규(宋穉圭)가 찬하고 두전과 음기는 가의대부(嘉義大夫) 사헌부대사헌(司憲府大司憲) 전주(全州) 이익회(李翊會)가 썼다. 그러나 비문이 마모되어 구비 우측에 신비(新碑)를 세웠고 그 아래에 최근 구비를 집자하여 세운 비(碑)가 있다. 전면에 해서로 쓴 유명조선국(有明朝鮮國) 증숭헌대부행정의대부호성군한촌선생이공휘주지묘(贈崇憲大夫行正義大夫湖城君寒村先生李公諱柱之墓) 28자는 후손 17명이 모여 1~2자씩 나누어 썼는데 서맥이 마치 한 사람 쓴 것처럼 서로 연결이 되고 있어 금석문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원래 호성군신도비를 1599년 전라도 순찰사 길창군 권협이 호성군의 묘갈문을 지었다는 기록이 나오나 어떤 연유인지는 몰라도 이후에 송치규에게 다시 받은 것으로 보아 아마 커다란 사건이 있지 않았나 사료 된다. 
길창군 권협이 전라도 순찰사로 있으면서 호성군 이주의 묘비문을 지었는데 만약 이 비문이 현재 남아 있었다면 상당히 문화재적 가치가 있었으리라 사료되나 아쉽게 없어져 여기에 기록하고자 한다. 여기서 권협이 지은 신도비의 내용을 통하여 이주 호성군에 대한 접근이 필요하다.

“공의 이름은 柱라 하고 자는 邦彦이신데 세조대왕의 고손이니 세조의 아들 덕원군 昭簡公  曙는 공의 증조이다. 
德源君이 靑鳧君 藩을 낳으시고, 청부군이 임천군 鑛을 낳으시니 임천군은 곧 공의 아버지다. 어머니는 사헌부 감찰을 증직받은 林有名의 딸이며  慶尙監司 林壽昌의 孫女이다. 
호성군은 1562년 7월 17일 태어났다. 사람들은 그 비범한 모습을 보과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이라 하며 칭송이 자자하였다. 공이 31세 때 왜놈의 큰 난리를 만났는데 그 해는 곳 임진년인지라 이 전쟁을 임진왜란이라 한다. 처음에 왜군은 장차 명나라를 침범할 흉계로 우리나라에 길을 빌려주기를 청하면서 대군을 출동하여 싸움이 벌어졌다. 팔도의 장병들은 사나운 왜놈의 바람결에 차례로 무너져 선조는 할 수 없이 의주 龍?으로 蒙塵하였다.
호성군은 그 말을 듣고 분함을 참을 수 없어 눈물을 뿌리며 宗廟社稷 회복하기를 所任으로 여기고, 의병을 일으켜 곧 의주 행재소로 달려가 왕을 호위할 결심을 하였다. 그러나 이때 왜적은 팔도에 가득 차 길이 막혀 갈 수가 없는지라 바다로 돌아 선조를 謁見하였다.
 이 무렵 宣祖께서는 평양에 집결해 있는 왜적을 아군이 당적할 수 없어 퍽 안타까이 여기던 때인지라 이를 알아차린 호성군은 자청하여 그 선봉장이 되고, 곧 성중을 뛰어들어 적 수천명을 베어 죽이고 달아나는 적을 추격하여 멀리 쫓았으니 이는 왜적에 대한 적개심이 충성과 용맹으로 나타난 것이며 비록 옛날의 名將이라도 이보다 더할 수는 없는 것이다. 
왕은 공에게 큰 상을 내리고 벼슬을 정의대부로 높이는 한편 호성군을 봉하고, 이듬해 왕이 한양으로 환궁할 때는 御駕를 호위하였다. 
그러나 1594년 사월 12일 갑자기 서거하니 이것은 전쟁으로 싸움터에서 너무나도 피로하신 나머지 병이 난 것이다. 선조께서는 사신을 보내 장례를 후히 지내게 하고 숭헌대부를 추증하였다. 이해 8월 양주땅에 묘를 안치하였는데 때에 겨우 33세의 젊은 나이였다. 조정에서는 록권과 철권을 내려 선무원종공신 일등훈에 책훈하였다. 
이로부터 32년 후인 1625년 10월 20일 전주 행지산 임좌 병향으로 묘를 이장하였다. 
부인 여흥민씨는 도사 민적의 딸님인데 슬하에 3남을 두었으니 장남은 懿性이요, 차남은 宗性이라 하였다. 두 아들은 음보로 修義副尉를 역임하고 3남 守性은 어려서 죽었다. 後配 安東金氏는 參奉 金禮元의 딸이다. 장남 懿性은 益山吳氏 參奉 應輝의 딸을 부인으로 맞이하였으나 후사가 없고, 차남 宗性은 竹山安氏 參奉 成佐의 딸을 부인으로 맞이하여 1남을 낳고, 둘째 부인은 청주 淸州張氏 通政大夫  應禎의 딸인데 또한 1남을 낳았으나 아직 모두 어린 나이다.  
萬曆二十七(1599)年 己亥 팔월 십팔일 가선대부 호조참판 길창군 권협이 글을 짓다.”라고 되어 있다.  

길창군 권협은 호성군의 생평을 간단하게 요점을 추려 글을 지었으며, 의병장으로서의 활동 상황과 선조를 호종하는 관계를 기술하였다. 또 애석하게 젊은 나이로 운명함과 동시에 1등선무원종공신과 녹권을 받았음을 기록하고 있다. 즉 권협은 동시대에 활동했으며 더 나아가 선무원종공신 심사를 맏은 직책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아주 잘 알고 글을 지었을 것으로 본다. 그러나 현재는 무슨 연유인지는 몰라도 길창군 권협이 지은 신도비는 없어지고 이후에 송치규가 撰하고 이익회가 쓴 신도비명이 묘소 앞에 세워져 있어 여기에 기록하여 비교하고자 한다.

?  호성군 이주 신도비

호성군(湖城君)의 신도비문(神道碑文)
 호성군 이공이 서거 하신 것은 서기 1594년인데, 처음에 묘를 경기도 양주땅에 국비로 예장하였다가 묘 자리가 이롭지 못하므로 삼십이년후인 1625년 전주북쪽 20리 거리의 행지산 갈록동 임좌의 길지를 잡아 이곳에 이장하였다.
 이전에 비문이 있었으나 희미하여 읽을 수가 없으므로 공(公)의 八세손 진사 계익이 다른 돌로 개수코자 하면서, 나의 제자인 그의 조카 필성을 보내 나에게 비문 써 주기를 부탁해 왔으나, 이제 내 나이 74세로 늙고 병들어 글을 못하니 여려 차례 사양하였지만 이기지 못하여 이 글을 쓰게 되었다.
 삼가 회고컨대 공(公)의 이름은 주(柱)요 자(字)는 방언 이며 호는 한촌이시다. 본관은 국성 전주이씨로 세조대왕의 제3자 덕원군 이서(李曙)는 공의 증조이시다. 덕원군이 경학을 깊이 연구하여 특히 주역과 예기에 정통하였고, 또 나라에 공이 있어 공신록에 기록되었다.
 할아버지 번(藩)은 청부군인데 형이신 숭선군 취와 더불어 도학과 덕행이 뛰어나므로 신진사류 조광조 김정(金淨)등과 깊은 친교를 맺아 왔다.
 아버지 임천군의 이름은 광(鑛)이신데 학문에 열중하여 능히 선대의 가풍을 이어 받았다. 어머니는 평택임씨 참판 유명(有名)의 따님으로 일찍부터 훌륭한 부덕을 갖추어 일가들이 다 칭찬하였다.
 1562년 칠월 17일 공(公)을 낳으시니 용모가 아름답고 천성이 활달하여 아버지 교훈을 착실히 이어받아 인물이 출중하였다. 중봉 조헌(趙憲)선생이 한번 보고 극찬하며 학문에 더욱 힘쓰도록 하니 공(公)은 더 한층 부지런히 배워 아침 일찍부터 밤 늦도록 까지 쉴새없이 정주학을 탐구해 마지않았으며, 항상 충효 두 글자를 입신의 근본으로 삼았다.   /김진돈 전주문화원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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