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독립운동 103주년을 맞아 오수 독립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끈 애국지사 40여 명의 숭고한 민족정신을 다시 새겨본다. 그 가운데 이주의(李注儀) 의사는 열 손가락과 열 발가락이 잘리는 고문을 받다가 옥중에서 순국했다. 나라를 위해 몸을 던진 위국헌신(爲國獻身)의 표상이다. 이주의 의사는 선비로서 몸을 던지고, 안중근 의사는 군인으로서 몸을 던졌다. 위국헌신 군인본분의 정신을 남겨준 안중근 의사와 같은 이주의 의사의 위국헌신 충사본분(忠士本分) 독립투쟁을 살펴보기로 하자.

  이주의 의사는 조선 태종대왕 이방원의 둘째 아들인 효령대군의 17세 손으로 고종 13년(1876년) 임실군 둔남면 용정리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 이름은 경국(卿國)이다. 1919년 고종 황제가 승하하고 국장을 할 무렵, 경성 장례 행렬에 참여했다가 3.1독립운동을 목격한 이기송(李起松) 지사 등 둔덕 이씨들이 귀향 후 임실 오수에서도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결의했다.

  이주의 의사는 3월 23일 임실군 둔남면 오수장날을 이용해, 이기송·오병용(吳秉鎔) 등과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다. 이 의사는 이날 오후 2시 오수리 장터에서 천도교도·기독교도가 중심이 된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장터를 시위 행진했다. 독립동지회가 펴낸 『한국독립사』에서는 사방에서 호응자가 5-6천여 명에 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오수리 원동산공원에서 이기송 지사는 “우리 조선은 독립국이었는데 10여 년 전에 일본에 합병 당하였으니 2천만 우리 국민 모두가 합심해야 한다.”고 연설했다.

  한국인 순사보 고택기(高宅基)는 이때 주도자인 이기송 지사를 강제로 체포해 일본군 주재소로 연행했다. 이주의 의사는 이에 대해 오병용·이병렬(李秉烈)·김일봉(金一奉) 등 8백여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주재소로 달려가 이기송 지사의 석방을 강력히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겁에 질린 일본인 순사 촌정(村井)이 마침내 이기송 지사를 석방했다. 이주의 의사는 다시 장터로 돌아와서 2천여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일본인이 경영하는 상점을 파괴하며 격렬한 시위를 벌이고 면사무소까지 행진했다.    면사무소에 도착해 그곳에 있던 면장·면서기들도 독립만세를 외치고 주재소로 향하게 했다. 주재소에 도착해 유치장 문을 부수고, 김영필(金永弼) 등 구금된 사람들을 석방시켰다. 이때 순사보 고택기가 총을 겨누며 위협하자, 그의 총을 빼앗고 경종대(警鐘臺) 아래로 끌고 나가 독립만세를 외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24일 저녁, 전주와 남원 헌병분대, 임실경찰서에서 출동한 일본 헌병 백여 명이 군중을 향해 발포하자 군중은 석전(石戰)으로 응전했다. 교전 과정에서 주민 1명이 숨지고 백여 명이 크게 다쳤다. 이주의 의사는 일제의 검문단속 때 체포돼, 1919년 9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주의 의사는 또 다시 독립운동을 벌이다 대구형무소에 구금돼 갖은 고문을 받았다. 결국 열 손가락과 열 발가락이 잘리는 고문후유증으로 1923년 11월 5일 옥중에서 순국했다.

  이주의 의사는 왕족의 후손으로서 나라가 위급할 때 몸을 던져 나라를 구하고자 했다. 의사는 삼계강사에서 익힌 강직한 선비정신을 온몸으로 실천하고자 했다. 군인의 본분을 지키고 죽음으로써 나라를 구하고자 했던 위국헌신 군인본분(爲國獻身 軍人本分) 정신을 실천한 안중근 의사의 위업과 같다. 정부는 의사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오수 일대에서 벌어진 만세운동에 가담한 둔덕 이씨 일가 16명은 재판에 회부돼 적게는 4월에서 많게는 7년에 이르는 징역형을 받아 온갖 고초를 당했다.

  이주의 의사의 아들인 이기한(李起漢)은 18살 때 고등문관에 급제할 정도로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고 나라의 근대화에 크게 기여했다. 이주의 의사의 순국정신을 기리고자 하는 뜻은 나라가 어지러울수록 선비들이 목숨을 바쳐 충성을 다했던 그 위대한 정신의 발현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우리 고향에서 이주의 의사와 같이 충성을 다하는 인재들이 계속 배출되기를 바라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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