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제학을 역임한 익산 출신 전라감사 소세양

<13>소세양 최병호 기자l승인2022.03.13l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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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세양 부부 묘소(디지털익산문화대전)

소세양은 익산 출신으로 문장과 시문으로 이름을 떨치고 좌찬성에 올라 대제학을 지냈다. 그의 집안 진주소씨는 그와 그의 형제들의 입신양명으로 익산지역을 대표하는 명문이 되었다. 그는 중종 22년 전주부윤을 역임하고 중종 24년 전라감사에 임용되어 1년여를 재임하였다. 이후 좌찬성을 역임하고 익산으로 낙향하여 20여년을 살면서 향촌교화에 힘썼다. 

▶익산을 대표하는 명문, 진주소씨 
소세양(蘇世讓)의 본관은 진주이고, 전북 익산 출신이다. 자는 언겸(彦謙), 호는 양곡(陽谷)이며, 아버지는 구례현감을 지낸 소자파(蘇自坡)이다. 그는 성종 17년(1486)에 익산 금마면 신용리(新龍里) 도천(道川, 도비골)마을에서 태어났다고 전한다. 그 마을이 갓을 만들던 곳이어서 ‘갓점’이라고도 했다.
진주소씨 족보에 의하면, 소세양 가문은 그의 고조부 소천(蘇遷)이 고려말의 혼란한 정국을 피해 경기도 진위(振威, 안성)로부터 그의 처향이자 농장이 있는 전주로 낙향하였다. 소천의 처는 전주유씨 유극강의 딸이다. 전주에서 익산으로 이주한 것은 그의 아버지 소자파(蘇自坡) 때이다. 익산은 소자파의 처향이다. 소양곡과 그의 형제들은 모두 익산 출신들이다. 남원에 살고 있는 진주소씨는 이와 다른 가닥이다.
소자파는 진사시에 합격하고 구례현감을 지냈다. 그에게는 소세양을 비롯해 6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모두 입신양명하였다. 다섯째 아들인 양곡 소세양과 둘째 아들 곤암(困庵) 소세량(蘇世良)은 문과에 급제하여 양곡은 좌찬성, 곤암은 대사간을 역임하였다. 나머지 4명도 무과 또는 음직으로 벼슬에 나왔다. 한 집안이 일시에 현달하였고, 이로 인해 익산의 진주소씨 집안은 일약 명문이 되었다. ‘금마에 전주이씨가 많이 살아도 진주소씨가 실세’라는 말이 있다.
익산의 진주소씨 주요 세거지는 익산시 왕궁면 용화리와 발산리 일대, 금마면 동고도리와 서고도리, 익산시 망성면 어량리 등지이다. 소세양 집안을 ‘발산소씨’(금마소씨, 익산소씨)라 하는 것은 그 지명에서 붙여진 것이다. 본관지 외에 세거지를 붙여 양반가를 호칭하였다.

▶전라감사를 지내고 좌찬성 겸 대제학 역임
소세양은 19세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중종 4년(1509) 24세 때 별시 문과에 을과 2등으로 급제하였다. 사간원 정언, 이조 정랑, 홍문관 교리, 사헌부 장령, 홍문관 직제학, 승정원 좌부승지, 황해도관찰사 등을 지내고 중종 19년 39세 때 이조참의에 임용되었다.
중종 22년(1527) 어버이를 봉양하기 위해 자청하여 전주부윤을 역임하고 예조참판을 거쳐 44살 때인 중종 24년 10월에 전라감사에 임용되었다. 1년여를 재임하고 이듬해 9월에 파직되었다. 그가 파직된 것은 ‘이몽린 사건’으로 인한 것이다. 이몽린은 전라우수사로 왜구를 소탕하였다고 거짓 보고하여, 이에 대한 책임으로 전라감사직에서 파직되었다.  
파직된 이듬해 중종 26년 6월에 형조참판으로 복귀하였으며, 진하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형조판서, 호조판서 이조판서 등을 지내고 중종 32년 종1품 우찬성, 이듬해 좌찬성에 임용되었다. 좌찬성은 정1품인 우의정 바로 아래 자리이다.
문장과 시문에 뛰어나 좌찬성으로서 홍문관 대제학과 예문관 대제학을 겸해 문형(文衡)의 자리에 올랐다. 세자시강원의 종1품 세자이사(世子貳師)도 겸했다. 문형은 ‘학문을 평가하는 저울’이라는 뜻으로 대제학을 칭하며 본인이 사직하지 않는 한 종신직이다. 문형은 정승보다 영예롭다는 자리로, “열 정승이 대제학 하나만 못 하다.”는 말이 있다.  

▶익산으로 낙향하여 20여년을 은거
중종 35년(1540) 55세 때 노모 봉양을 위해 여러 차례 사직을 청하여 익산으로 낙향하였다. 여기에는 사림들과의 갈등도 있었던 것 같다. 낙향후 ‘퇴휴당(退休堂)’을 짓고 20여년을 유유자적하다가 명종 17년(1652) 77세를 일기로 졸하였다. 
영조 30년(1754) 익산군수로 부임한 남태보가 편찬한 『금마지』에 보면, 익산은 마을 기강이 엄격하여 양반들이 살기 좋은 곳으로 다른 지방에서 못 살게 된 빈한한 양반들까지 모여들어서 양반호가 타지방에 비해 월등히 많다고 하였다. 이렇게 된 것에 대해 소양곡이 낙향하여 이 지방의 사회기강을 엄격히 세우고 풍속을 순화한 결과라고 평했다.  
남태보가 말한 익산의 양반호 실정을 좀 더 언급하면, 이들 양반의 대부분이 가난한 농민이고, 이들 중에는 지극히 가난하여 살고 있는 집이 움막과 같고, 먹고 사는 꼴이 걸인을 방불케 하는 양반들도 있다고 하였다. 그럼에도 향촌 기강이 엄격해 양반으로 대접받았다는 것이다.
향촌 사회에 양반세가 유지되는 것은 중앙에서 고위직을 지낸 인물이 낙향하는 것에 힘입은 바 크다. 그렇지만 조선후기 사회는 서울의 경화자제들에 의해 관직이 장악되었고, 벼슬이 끊겨도 낙향하지 않는 경향이 일었다. 여전히 양반이 중심이고 그 힘이 막강하였지만, 향촌 사회가 예전 같을 수는 없었다.  

▶구비전승 -별명당, 황진이, 중국사신 이야기
 「벌명당과 발산소씨전설」은 진주소씨가 소세양 당대에 벌족하게 된 명당자리에 얽힌 이야기이다. 효성이 지극한 부부가 부모님을 모실 명당자리를 찾게 해달라고 정성을 드리자 도승이 나타나 벌명당을 알려주면서 벌집이 나오도록 봉우리를 허물어 묘를 쓰고 북쪽으로 30리 떨어진 곳에 살라고 하였다. 부부가 그 자리에 묘를 쓰고 북쪽 30리 밖인 금마면에 가서 살았는데 집안이 번창해져 거족이 되었다. 이들이 발산소씨의 조상이라는 것이다.
송도 기생 황진이와의 일화도 전한다. 황진이가 지었다는 ‘소세양 판서를 보내며’라는 시가 있다. 소세양은 여색에 빠지는 것은 남자가 아니라고 하였다. 황진이와 한 달만 지내고 헤어지겠다고 하고 이 약속을 못 지키면 사람이 아니라고 하였다. 황진이의 시를 보고, ‘나는 사람이 아니다’고 하면서 더 머물렀다고 한다. 
그는 문장이 뛰어나 중국 사신을 대접하는 원접사 등으로 많이 활약하였는데, 중국 사신을 따돌린 이야기도 있다. 그는 ‘금마삼기(金馬三奇)’라고 하여 녹지 않는 빙교(氷橋)가 있고, 잘라도 계속 움이 돋아나는 소나무 움송[筍松]이 있으며, 일년에 세 번 꽃피어 세 번 열매를 맺는 ‘삼율(三栗)’이란 밤나무가 있다고 하였다. 중국 사신이 확인하러 내려오려고 하자 삼기가 있는 고을에 역질이 돌아 쑥밭이 되었다고 하여 돌려보냈다는 얘기이다.

▶한 대(代)가 길면 한 대가 짧다
『명종실록』 그의 졸기에, ‘훌륭한 재주가 있어 글씨도 잘 쓰고 시문(詩文)에도 능하여 일찍이 대제학이 되었으나, 공론(公論)의 배척을 받아 물러났다.’고 하였다.  『인조실록』 사신의 평에 보면, 그는 권신 김안로와 가까웠다. 사론의 배척은 이와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김안로는 양곡이 낙향하기 3년 전인 중종 32년에 사사되었다.
그런가 하면 『지봉유설』에는, “공(소세양)은 비록 사론의 배척을 받았으나, 일찍이 물러나 집에 있어서 맑고 한가한 복을 누린 지 거의 20년이 되었으니, 근세에 글하는 사람치고 제 수명과 부귀를 누린 사람 중에 그보다 좋은 자가 없었다.”고 하였다. 
소세양의 외아들 수(遂)는 순창군수를 지냈다. 친손자는 한 명인데 요절하였다. 익산의 소씨 가문은 17세기 중엽에는 기울어져 있었다. 현종 1년(1660) 양곡 소세양의 종현손 소두산이 문과에 장원급제하였는데, 가세가 워낙 빈한하여 도문연(到門宴)을 베풀 길이 막연하였다고 한다. 도문연은 과거 급제자가 집에서 베푸는 잔치이다. 한 대가 길면 한 대가 짧다는 속담이 있다. 
소세양의 묘소는 익산시 왕궁면 용화리에 있으며, 금마면 기양리에 있는 화암서원(華巖書院)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며, 문집으로 『양곡집』이 전한다.


최병호 기자  soonkim223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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