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과방목(규장각), 반석평

반석평은 남의 집 종으로 있다가 부잣집 양자로 들어가 8도 감사와 5도 병사를 지내고 형조판서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중종 27년(1532) 61세의 나이로 전라감사에 부임하여 1년여를 재임하고 이듬해에 파직되었다. 청렴하고 겸손하였으며 재상의 반열에 올랐음에도 옛 주인에 대한 도리를 다하였다. 유엔 사무총장을 지낸 반기문이 그 후손이다. 

▶천민 출신
반석평(潘碩枰, 1472~1540)의 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공문(公文), 호는 송애(松厓)이며, 아버지는 반서린(潘瑞麟)이다. 시호는 장절(壯節)이다. 그의 형 반석정은 생원시에, 동생 반석권은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그의 출신에 대해 유몽인의 『어우야담』에는 이참판댁의 노비로 나온다. 그가 머리가 명석하고 배움에 대한 열정이 강하여, 면천시켜 후손이 없는 친척집 양자로 입적시켰다는 것이다. 이익의 『성호사설』에는 반석평이 재상집 종으로 부잣집 양자로 들어가 재상의 반열에 올랐다고 하였다. 이덕무의 『청장관전서』에도 반석평이 종 출신이라고 하였다.
그런가 하면 『중종실록』에는, “천얼(賤孼) 출신으로 시골에 살았는데, 그가 학문에 뜻이 있음을 그의 조모가 알고서, 천얼임을 엄폐하고 가문을 일으키고자, 그 손자를 이끌고 서울로 와서 셋집에 살면서 길쌈과 바느질로 의식을 이어가며 취학시켰다.”고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문과시험에 양인 이상만이 응시자격이 있었다. 천얼은 천첩 소생을 말하는 것으로 문과에 응시할 자격이 없었다. 반석평은 반서린의 양자로 들어가 면천되어 과거에 응시했던 것으로 보인다. 

▶옥구 출신
광주 반씨는 거제 반씨에서 분파한 성씨이다. 여말선초 반충이 조선 개국 원종공신에 책봉되어 광주백에 봉군되면서 광주반씨로 분파되었으며, 그 후손들이 전북 군산시 옥산면과 충북 음성군 원남면 등에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다고 한다. 
반석평은 전북 옥구(군산)출신으로 보인다. 1750년대 영조대에 편찬된 『여지도서』, 「옥구읍지」  인물조에 반석평이 실려 있다. 1790년대 정조말에 편찬된 『호남읍지』 「옥구읍지」편에도 이 지역출신의 과거급제자로 반석평이 실려 있다. 
근래 편찬된 “디지털군산문화대전”에는 군산시 옥산면 출생이라고 하였다. 아버지 반서린의 묘도 군산 회현면 고사리에 있었는데 근년에 충북 음성으로 후손들이 이장하였다고 하였다. 반석평의 묘도 남양주에 있다가 근래에 음성군으로 이장하였다. 
“디지털음성문화대전”에는 반석평이 음성 출신이라고 하고 있다. 그러나 영조대 『여지도서』 「음성읍지」 인물조에는 반석평이 실려 있지 않다. 음성군은 반석평의 후손 반기문총장의 고향이다. 광주반씨들이 반석평의 묘를 음성으로 이장하고 재실 ‘장절사’를 건립하였다.

▶8도 감사와 5도 병사를 지내고 형조판서에 올라 
반석평은 연산군 10년(1504) 32세 때 생원시에 3등 8위로 합격하였다. 전체 합격자 100명 중 38위의 성적이다. 이때 그의 형도 동방 합격하였다. 중종 2년(1507) 35살에 식년시 문과에 3등(병과) 22위로 급제하였다. 전체 급제자 33명 중에 32위이다.
그가 뛰어난 역량을 지닌 인물이었음은 문과 급제후 한림직인 검열에 임용된 것에서도 짐작해 볼 수 있다. 중종 36년 그의 오랜 벗 가선대부 장례원판결사 정사룡(鄭士龍)이 지은 그의 묘갈에 보면, 성균관에서 공부할 때 훌륭한 명성으로 동년배들을 감복시켰으며, 과거 급제후 한림에 임용되어 사관으로 5년간 있었다고 하였다.
그는 또 문무를 겸한 유장(儒將, 문신 장수)이었다. 사헌부 감찰, 사간원 정언, 호조ㆍ형조ㆍ예조의 정랑을 지내고 세 품계를 건너뛰어 함경도 경흥부사에 임용되었다. 그가 함경도관찰사에 임용될 때도 문무를 겸비하였다고 하여 뽑혔다. 그는 문신이면서도 무에 능하고, 양계지역의 일을 잘 알아 함경도절도사 등 변방의 장수로 여러 차례 임용되었다.  
그가 벼슬생활을 하는데 미천한 출신이 큰 장애요인이 되었다. 『중종실록』 9년조에 보면, 그가 당대 최고의 엘리트들이 가는 홍문관 관원에 제수되자 사간원에서, 홍문관은 인물만이 아니라 문벌도 보아야 하는데 그의 집안이 한미하다고 하여 임용에 반대하였다. 중종 31년에는 공조판서에 제수되자 사헌부에서, 물망이 가벼워 여러번 대간에 제수되었다가 논박을 받고 체직된 자를 육경에 올려서는 안된다고 반대하여 결국 공조참판으로 고쳐 임용되었다.
그는 8도 감사를 모두 지낸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정조대의 실학자 이덕무는 『청장관전서』에서 8도의 감사를 모두 지낸 인물은 함부림과 반석평 두명 뿐이라고 하고, 반석평은 또 5도 병사를 지냈다고 특기하였다. 그런데 또 그의 묘갈에는 충청, 전라, 평안, 함경, 황해 등 다섯 도의 관찰사를 지냈다고 되어 있다. 관찰사에 임용만 되고 부임하지 않은 것은 묘갈에 제외한 것 같다.
 반석평은 예조와 호조, 공조의 참판을 두루 지내고 명나라 사신으로도 두 번 다녀왔다. 중종 34년(1539) 67세 때에 한성판윤을 거쳐 형조판서에 올라 오위도총관을 겸했으며, 이듬해 병으로 한가한 지중추부사로 옮겼다가 졸하였다.

▶중종 27년 전라도관찰사 부임
중종 27년 2월 전라감사에 제수되었으며, 『호남도선생안』에 의하면 3월에 전라감영 임지에 부임하였다. 이후 1년여를 재임하고 이듬해 중종 28년 3월에 교체되었다. 부인이 병으로 고생한다는 말을 듣고 허락을 받지 않고 서울로 상경하였다가 추고(推考)를 받고 파직되었다. 
그런데 그해 파직된 직후인 6월에 또 경상감사에 제수되었다. 이때도 부인 문제로 체직되었다. 부인이 죽자 장례기간을 50일로 잡았는데, 경상감사로 부임하지 않으려고 일부러 길게 잡은 것이라고 하여 사간원의 탄핵을 받고 교체되었다. 
이때 영의정 장순손이 경상도는 땅이 넓고 사람이 많아 적임자를 찾기 어려우니 반석평이 허물은 있지만 임용하자고 하였는데, 여기에 전라감사 때 치적이 언급되어 있다. 장순손이 그를 변호하면서, 전라감사 때 도토리 1만석을 마련하여 기민(飢民)을 구제하였다고 하였다. 

▶청렴, 겸손하고 옛주인에게 도리를 다해
『중종실록』에, 반석평은 한미한 출신으로 시속에 구애받지 않고 임용되어 어진이를 기용하는 길을 만들었다고 하였다. 그는 이후 신분에 구애받지 말고 인재를 써야 한다는 선례로 많이 인용되었다.
이익의 『성호사설』에 반석평에 대해 평하기를, “청백한 행실과 겸공(謙恭)한 마음으로 팔도의 감사를 다 역임하고 … 정경에까지 이르렀다”고 하였다. 이어 그가 재상의 반열에 올랐음에도 예 주인집에 대한 도리를 잃지 않았다고 다음과 같이 기록해 놓고 있다.
“옛 주인집 자손이 잔미해서 길에 걸어다니는 것을 보고 반석평은 초거(軺車)에서 내려 그의 앞으로 달려가 절하였다. 하루는 소장(疏章)을 올려 자기의 사실을 바로 여쭈고(자신의 출신에 대해 자초지종을 말하고) 자기의 벼슬을 깎아서 주인집 자손에게 주도록 청하였다. 조정에서는 그의 말을 장하게 여겨 그 주인집 자손에게 관직을 제수한 다음, 반석평도 그 자리에 그냥 있도록 하였다. 이 사실은 지금까지 전해오는데 많은 사람들이 찬탄해 마지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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