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기일(진안역사박물관 학예연구사)

(2) 삼국시대 

삼국시대에 백제는 금강을 거슬러 올라와 상류인 용담을 거쳐야만 가야 방면으로 진출할 수 있었으며, 대가야 등의 가야세력이 백제로 진출하기 위한 주요 통로인 금강으로 이용하기 위해서는 역시 용담지역을 지나야 가능하였다. 이에 용담지역은 예로부터 백제의 영역으로 알려져 백제와 관련된 유적과 유물 출토된 바 있으나, 이러한 지리적 특수성으로 인하여 백제나 가야문화의 영향을 보여주는 고고학 자료가 확인되고 있다. 특히 용담댐 수몰지구에 대한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된 황산리 고분군, 와정 유적 등에서는 백제와 가야 관련 유적이 모습을 드러내면서 백제권역과 가야권역이 이어지는 연결통로이자 백제문화와 가야문화의 점이지대로서 용담지역의 역사적 가치가 다시 한번 주목받게 되었다.

 

① 황산리 고분군
용담면 월계리에 위치한 황산리 고분군에서는 가·나지구에서 총 17기의 가야계 돌덧널무덤이 조사되었다. 조사된 무덤과 유물의 양상으로 보아 황산리 고분군은 5세기 말엽에 만들어진 무덤군으로, 이 지역이 백제와 가야, 신라가 접경을 둔 각축장이었음을 엿볼 수 있는 유적으로 평가된다. 가야계 돌덧널무덤은 가야와 관련된 유적인 남원 월산리·두락리, 임실 금성리, 장수 삼고리 등에서 조사되면서 전북 동부지역에 밀집된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황산리 고분군에서는 다양한 토기류와 철기류 일부가 출토되었다. 출토된 토기류는 세발 달린 토기(三足器), 목 짧은 항아리(短頸壺), 굽다리 접시(高杯) 등의 백제계 토기와 구멍 뚫린 굽다리 접시(透窓高杯), 긴 목 항아리(長頸壺), 낮은 원통모양 그릇받침(低平筒形器臺) 등의 가야계 토기가 대부분으로, 수량은 백제계 토기와 가야계 토기가 거의 반절씩 확인되었다. 이 외에도 굽다리 긴 목 항아리(臺附長頸壺), 손잡이 달린 잔(把手附盞) 등 신라계 토기도 확인되고 있어 이 지역이 백제·신라·가야의 각축장이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황산리 고분군 ‘가’지구에서는 가야토기와 백제토기가 비슷한 양상으로 출토되고 있는 반면에 ‘나’지구에서는 고령 양식의 가야토기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 특히 ‘나’지구에서는 전형적인 백제토기인 세발 달린 토기가 출토되지 않는다는 점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② 와정유적

용담면 월계리에 위치한 와정유적은 금강의 본류가 주자천에 합쳐지는 지점에서 U자형으로 휘감아도는 부분의 북쪽 인접 구릉지대이자 봉화산(峰火山)에서 남동쪽으로 뻗은 지류의 동쪽 말단부에 자리한 유적으로, 황산리 고분군에서 약 350m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유적에서는 외곽부분에 돌려진 목책토성이 확인되었고, 토성 내부에서는 7기의 주거지와 저장공 등이 조사되었는데, 조성시기는 5세기 경으로 판단되고 있다. 토성은 판축법으로 쌓아올린 것으로 보이며, 토성의 목책열과 그 주위의 조사에 의하면 화재가 있었던 것으로 판단되는데, 이 화재가 이 유적의 폐기와 관련될 가능성이 큰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주거지는 흙을 일정한 깊이로 파낸 다음 그 안에는 생활공간이 마련되었고, 북벽 내지 북서벽에 추위를 피하기 위해 만든 온돌시설이 갖춰져 있다. 그리고 아궁이 바닥의 중앙부분에는 발형토기를 뒤집어서 두거나 돌을 박아두어 솥받침으로 이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출토유물 대부분은 세발 달린 토기, 긴 계란모양 토기, 곧은 입 항아리, 시루 등 백제토기가 절대량을 차지하고 있으며, 뚜껑 있는 접시(蓋杯)와 같은 가야토기도 일부 섞여 있다. 이러한 모습은 와정유적을 축조한 세력이 백제와 관련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임과 동시에 백제 세력이 진안지방으로 진출하면서 그 거점으로 이 유적을 축조하였을 것으로 추정하는 바탕이 되고 있다. 또한 이는 백제와 가야가 당시에 이 지역을 경유하는 교통로로 이용하여 교류관계가 있었음도 암시하고 있다. 백제가 금강수계로 진출하여 진안지역 등으로 영역을 확장하던 시기가 언제인가에 대해서는 분명히 알기 어려우나, 5세기를 전후하여 백제의 영역 확장과 관련한 기록으로는 공주 천도 이후 동성왕의 가야지역으로의 진출(487년)이 관련될 가능성이 있다.

③ 월계리 산성

월계리 산성은 용담면 성남마을 뒤 서쪽 성재산에 위치한 산성으로, 성남리 산성으로 알려져 왔으며, 용담댐 건립 수몰선에서 제외되어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대략적인 현황조사만 이루어졌었다. 이 산성은  『신증동국여지승람』 용담현 고적조에 전하는 ‘고산성(古山城)’으로 알려져 있으며,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대산성(帶山城)’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용담댐이 건립된 이후 산성은 주변지역의 수몰로 인하여 섬에 가까운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그러다 최근 산성의 규모와 성격 등을 밝히기 위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지면서 산성의 다양한 면모를 파악할 수 있었다. 조사 결과 산성의 둘레는 584m로, 잔존성벽의 높이는 최고 5m 이상이며, 관련 시설로는 문지 2개소와 평탄대지, 추정 수구지 등이 파악되었다.

출토유물 등으로 보아 삼국시대에 초축되어 후삼국 시기까지 증·개축되어 지속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한 지정학적 측면에서 백제의 지방방어체계 및 가야의 금강상류지역 진출과 연관된 가능성이 있을 것으로 판단되는 등 월계리 산성이 백제, 가야 등의 접경지역으로서 국가의 관문역할을 수행했던 매우 중요한 유적으로 주목되고 있다.

④ 월계리 기와가마터

월계리 기와가마터는 용담면 월계리 원월계마을에 위치한 기와 생산유적으로, 능선의 경사지역 말단부에서 총 3기의 가마가 발견되었다. 가마 중에서 가장 잔존상태가 양호한 2호 가마를 살펴보면, 아궁이와 연소실, 소성실, 연도부의 전 부위가 남아있는 등요로서, 8개의 단이 석축으로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또한 소성실의 천정부위에는 직경 50cm의 보조 연통이 시설되어 있고, 가마 앞부분인 요전부에는 집석시설이 발견되어 조업이전에 행했던 의례장소로 추정하고 있어 주목된다.

출토유물은 집석시설의 토기류를 제외하면 모두 암, 수키와로 평기와를 주로 생산했던 것으로 보인다. 가마의 운영시기는 7세기 후반을 전후한 시기로 보고되었다.

⑤ 수천리 고분군

용담면에 위치한 수천리 고분군에서는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묘가 조사되었는데, 고분군이 위치한 지역은 세 갈래로 뻗은 설상지맥(舌狀支脈)의 가운데 능선을 택하여 무덤을 조성하여 좌우에 청룡과 백호를 두는 풍수지리 경향을 보인다고 한다.

유적에서는 고려시대 돌덧널무덤 53기, 고려~조선시대 움무덤 37기, 조선시대 돌널무덤 5기, 회곽묘 3기 등 총 98기의 분묘가 조사되면서 서로 구조가 다른 고분이 동일지역에서 함께 조사되어 주목을 받았다. 구릉 정상부부터 하단까지 고분의 유형 구분 없이 고르게 분포하고 있으나 주변에 돌이 둘러진 돌덧널무덤은 보다 상단에 입지하고 규모도 커서 상위계층의 고분으로 이해되고 있다. 유적은 11세기에서 12세기 중반에 걸쳐 축조한 것으로 보고 있다.

출토유물은 청자, 토기, 청동유물, 철제유물 등이 확인되는데, 특히 고려시대의 돌덧널무덤과 움무덤에서는 11세기의 해무리굽청자와 12~13세기의 다양한 청자 등이 출토되었다. 출토된 청자의 종류는 완, 대접, 접시, 병, 주자(주전자) 등이 있으며, 장식기법으로는 음각, 양각, 압출양각, 상감, 철화 등이 확인된다. 이들 청자 중 18호 석곽묘에서 출토된 주자(注子)는 일반 대접과 접시 등과 같은 종류과 구별되는 보다 고급기종에 속하는데, 일상용기를 주로 매납한 고려시대 무덤에서 주자의 출토 예가 매우 드문 점에서 그 가치가 더욱 주목된다.

토기류로는 병, 합, 향완, 발, 벼루 등이 있으며, 대부분 회색의 연질계통이다. 청동유물로는 허리띠, 접시, 발, 합, 숟가락과 젓가락, 동곳(상투를 튼 후에 풀어지지 않도록 위에 꽂는 장식), 인장(印章), 거울, 동전 등이 있다. 철제유물로는 가위 등이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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