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감사열전-영의정 권철과 선무1등공신 권율 부자

전라일보l승인2022.06.19l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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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완주 운주면 이치전적비
   
▲ 행주산성 덕양정(문화재청)
   
▲ 헹주산성 대첩비각(문화재청)

권철과 권율은 조선초의 대학자 권근의 후예로 부자간에 전라감사를 지냈다. 권철은 명종 11년(1556)에, 권율은 선조 25년(1592)에 전라감사를 역임하였다. 이후 권철은 영의정을 네 번이나 역임하고 복상(福相)이라고 칭송되었으며, 권율은 임진왜란 때 도원수로 큰 공을 세우고 선무공신 1등에 책봉되었다. 오성 이항복이 권율의 사위이다.

▶권근의 후예 권철과 권율 부자
권철(權轍)과 권율(權慄) 부자는 안동권씨로 조선초 대학자 예문관대제학 권근의 후손이다. 권철의 5대조가 권근이고, 고조부가 의정부 찬성에 오른 권제이다. 증조부는 연천현감 권마, 조부는 양근군수 권교, 아버지는 강화부사 권적(權勣)이다. 권철의 어머니는 순흥안씨 안탁의 딸이다. 
권근의 가문은 조선초의 대표적인 벌족이다. 권근의 아들 권제와 그 장남 권람은 모두 문과에 장원급제하였는데, 국왕의 특차에 의한 것이다. 권람은 본래 4등이었는데, 문종이 장원으로 올렸다. 권람은 한명회, 신숙주와 함께 세조의 핵심 측근으로 한명회를 세조에게 소개한 인물이다. 권람은 권철의 종증조부가 된다.

▶권철, 전라감사를 지내고 영의정을 네 번이나 역임한 복상
권철(1503~1578)의 자(字)는 경유(景由), 호는 쌍취헌(雙翠軒)이다. 1528년(중종 23) 진사시에 합격하고 중종 29년 32살에 식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성균관에 분관(分官)되었다가 전임사관인 예문관 검열에 임용되었다. 사관으로 있으면서 영의정 김안로의 잘못을 직필하였다가 좌천되었다.
김안로가 처형된 후 사관에 복직되었다. 이민구가 지은 권철의 비명에서, 중종 34년에서 명종 2년까지 9년간 관력을 옮겨보면, 육조는 이조좌랑과 병조정랑, 사유(師儒)는 성균관 직강, 논사(論思)는 홍문관 교리, 언관(言官)은 사헌부 지평과 사간원 헌납, 제서(諸署)는 군기시 부정과 사복시 정, 춘방(春坊)은 문학과 필선, 의정부는 검상과 사인 등을 두루 거쳤다. 
이후 승정원 도승지, 경상감사 등을 지내고 명종 11년(1556) 9월에 전라감사로 부임하여 1년여를 재임하고 이듬해 10월에 이임하였다. 이후 이조판서와 병조판서를 지내고 우찬성에 올랐으며, 명종 20년 윤원형이 죽자 이듬해 우의정에 제수되었다. 명종 22년 명나라에 등극사로 다녀왔고 좌의정을 거쳐 선조 4년(1571) 영의정에 올랐다. 
이후 권철은 선종 6년, 선조 7년, 선조 9년 영상에 제수되어,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 영의정에 네 번이나 올랐다. 권철이 사양하면 선조는 어필을 내려 불렀으며, ‘경은 팔다리와 같은 보필로서 가뭄에 비와 배를 젓는 삿대와 같다.’라고 하였다. 견여(肩輿)로 조정에 들어올 것을 명하고, 매양 조알할 때에 내시로 하여금 부축하게 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복상(福相, 복 있는 재상)이라고 칭송하였다. 몸가짐이 신중하여 일찍부터 재상의 물망에 올랐다. 선조 11년(1578) 영의정 재임 중 76세에 졸하였다. 의정부의 뜰에 있는 큰 괴목이 폭풍으로 부러지니, 권철이 웃으며 말하기를, “이는 내가 죽을 징조이다.” 하더니, 과연 병들어 죽었다. 시호는 강정(康定)이다. 

▶전라감사 권율, 군사를 이끌고 행주산성에서 대승
권율(1537~1599)의 자는 언신(彦愼), 호는 만취당(晩翠堂)ㆍ모악(暮嶽)이다. 아버지는 권철, 어머니는 창령조씨 조승현의 딸로, 그 사이에서 막내로 강화도에서 태어났다. 권율은 일찍이 벼슬에 뜻이 없다가 아버지가 죽기 전에 막내 아들 권율을 빤히 쳐다보면서, “널 내가 낳았구나”라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는데, 이 말에서 깨달음을 얻어 금강산에 들어가 과거 공부를 시작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권율은 실제로 선조 15년(1582) 매우 늦은 나이인 46세에 식년시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예조좌랑, 호조정랑, 전라도 도사, 의주목사 등을 지냈고,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광주목사에 제수되었다. 이치전투에서 황진과 함께 대승을 이끌고, 그해 8월에 이광의 후임으로 전라감사에 임용되었다. 1년여를 전라감사로 재임하고 이듬해 1593년(선조 26) 7월경 이임하였다.
전라감사에 임용된 그해 12월 한양 도성 수복을 위해 1만여명의 전라도 병사들을 이끌고 북진하여 경기도 오성 독성산성(禿城山城)에 들어가 진지를 구축하고 일본군을 물리쳤다. 이어 한양에 가까운 행주산성(幸州山城)으로 들어가 1593년 2월 1만의 병사로 일본의 3만대군을 대파하였다. 이때 부녀자들이 치마에 돌을 날랐는데, 여기에서 ‘행주치마’라는 명칭이 유래하였다. 행주대첩은 진주대첩, 한산도대첩과 함께 왜란 3대첩의 하나이다. 
행주에서 대승을 거둔 후 일본의 재침에 대비해 파주산성(坡州山城)으로 옮겼으며 전쟁이 소강상태로 들어가자 전라도로 복귀하였다. 행주대첩의 공으로 선조 26년 6월 도원수에 제수되어 전라감사에서 7월경 이임하고 영남에 주둔하였다. 

▶도원수 권율, 조선 전군을 통괄하고 선무1등공신에 책봉
도원수에 임용된 그해 12월 권율에게 수군과 육군을 모두 관장하게 하였다. 도망병을 즉결 처분한 것이 문제가 되어 파직되었다가 바로 한성판윤으로 기용되어 호조판서와 충청감사를 거쳐 다시 도원수가 되었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일본군의 북상을 막기 위해 울산에 주둔하다가 명나라 장수 양호의 퇴각 명령으로 철수하였다. 
왜란이 끝난 후 1599년 63세에 타계하였다. 권율은 인품이 사람을 거느림에 있어 친화와 사랑으로 성심을 보이고, 엄격하기만을 주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즐겨 복종함으로써 위급한 때에 힘입었던 것이라는 평이 있다. 신흠이 지은 권율 비명에는, 8척 장신으로 용모가 준수하였으며 풍채가 엄중하고 행실이 충직하였다고 하였다.
권율에게는 딸 하나만 있고 아들이 없었다. 조카 권익경(權益慶)을 양자로 들여 대를 이었다. 사후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선무공신(宣武功臣) 1등,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으로 추봉되었다. 시호는 충장(忠莊)이다. 권철과 권율의 묘는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에 있다.

▶권율의 사위 이항복 
오성 이항복(李恒福)을 권율의 사위로 삼은 것은 권철이라고 한다. 권철이 그 인물됨을 알아보고 집안의 반대에도 혼자 우겨 손주 사위로 삼았다고도 하며, 공부에 관심이 없는 아들 권율을 일깨우기 위해 성균관 유생 이항복을 손주사위로 삼았다고도 한다. 
이항복은 9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밑에서 공부하였으며 16살에 어머니마저 여의었다. 어려서 공부를 멀리하고 놀기 좋아하였다. 해학과 기지가 넘치는 많은 일화가 전한다. 임진왜란 때 도승지로 선조를 호위하고 병조판서를 다섯 번이나 역임하면서 국난극복의 주역이 되었다. 한음 이덕형과 당파를 초월한 우정으로 이름이 높으며 영의정에 올랐다. 
이항복은 광해군 때 인목대비 유폐에 반대하여 북청에 유배되어 배소에서 졸하였다. 유배 길에, “철령 높은 봉에 쉬어 넘는 저 구름아/ 고신원루(孤臣寃淚)를 비 삼아 띄워다가/ 님 계신 구중궁궐에 뿌려본들 어떠리.”라는 유명한 시를 남겼다. 
임진왜란 때 사위 이항복이 병조판서로 장인인 도원수 권율보다 관직이 더 높았다. 둘 사이에는 또 천민 출신으로 팔도감사에 오른 정충신의 이야기도 전한다. 

이동희 (예원예술대학교 교수, 前 전주역사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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