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그리고 우리 아들 딸들아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하며 앞으로 영원히 행복하여라"

  6.25을 앞두고 호국선열들의 희생과 수고를 생각하면 전국 각지에서 얼마나 많은, 숭고한 이들이 사랑하는 가족과 자유, 국가를 지키기 위해 여러 모양으로 애썼나를 다시금 돌아보게 한다.

  당시 16세의 어린 소년의 몸으로 대구에 가서 군에 지원했으나, 어리다는 이유로 받아주지 않고 노무직으로 전방에서 포탄 등을 나르며 생사의 고비를 넘긴 유공자가 있다.

  김기중 유공자는 1953년 3월 백마고지 인근 백암산에서 전투하는 5사단 27연대에 배속받아 포탄 40밀리, 80밀리, 연막탄, 탄약 등을 나르며, 낮에는 호속에서 자고 밤에는 밤새도록 탄약 등을 나르는 일을 했다.

  밤이면 포탄을 짊어지고 가서 아군호를 찾지 못하면 새벽에 포탄을 지고 되돌아오는 날도 부지기수였다.

  국군이 전진과 후퇴를 반복하면서 김 유공자의 소속도 5사단, 3사단, 6사단으로 바뀌어 복무가 계속되던 차에 그는 부상을 당해 2주간 치료를 받고 다시 부대에 복귀했다.

  "치료를 받고 중대본부에 도착하니 전에 같이 포탄을 나르던 소대원 7명이 전사해 시체가 도착해 있더군요"

  그는 전우들의 시체를 화장해 유골함에 담아 춘천 노무사단 보급관에게 가져다 주었다.

  "만48시간 화장해 잔불이 꺼진 후, 24시간 식혀서 유골을 유골함에 담아 노무사단에 가져다주니 보급관이 '어젯밤 10시에 전투가 종료됐다'며 유골함을 보고 울먹이던 기억이 납니다"

  이후 김 유공자는 미439야전공병중대로 배속받아 근무하다 1954년 귀향증명서를 가지고 군복을 입고 귀향한다.

  고향 김제에 내려가 결혼하며 생활하던 중 그는 군에 갈 나이가 돼 군에 다시 입대해 1관구사령부 공병시설대로 배속받아 복무를 한다.

  사랑하는 부인과 함께 자녀들을 훌륭하게 키운 김 유공자는 "이렇게 살아온 내 인생 누구에게 말할 수 없고, 이제 내 인생 정리할 때가 됐습니다"며 "이제는 유공자의 몸으로 국가에서 내 몸을 지켜주고 사후에는 국군묘지에 묻히게 해주니 본인 몸은 나라의 것입니다. 이 한 몸 어느 대학에 장기와 사체를 기증할까 합니다"고 전했다.

  '어느 유공자의 일대기'는 김기중 유공자의 자서전으로, 출생부터 성장, 전쟁, 이후 사회생활 등을 기록했으며, 그는 자서전에서 본인의 일생을 허심탄회하게 있는 그대로 서술했다.

  "내 뒷바라지 하느라고 이일 저일 가리지 않고, 내곁에서 우리 4남매 멋있게 키운 당신, 끝까지 어려울 때마다 참고 참아 이 자리까지 함께 동행한 그대에게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라는 말밖에 할 말이 없소"

  공부에 전념할 시기에 학업을 중단하고 격동의 시기를 거쳐온 김기중 유공자는 '감사'와 '미안함' 그리고 '사랑'을 가족과 국가에 전하며 말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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