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효자 황민찬 정려 전경
▲ 열부 옥천육씨 정려 전경
▲ 화산서원
▲ 황방촌영정
 
 
진안군 안천면에는 ‘백화리(白華里)’라는 지역이 있다. 이 곳은 이화낙지(梨花落地, 배꽃이 땅에 떨어짐) 형국의 명당이 있는 곳으로, 하얀 배꽃의 흰 ‘백(白)’와 함께 ‘화(花)’와 통하는 ‘화(華)’로 이름 지어졌다고 전하는데, 실제로 백화리 북쪽에 위치한 산에는 배나무가 울창하였다고 한다. 또한 백화리에는 이화낙지(梨花落地) 형국의 윗마을·중간마을·아랫마을로, 울창한 배나무 숲에서 배꽃이 떨어지는 위치에 따라 이름지어졌다고 하는 상리(상배실), 중리(중배실), 하리(하배실)마을이 있다.
 
이들 마을 중 특히 중리마을에는 장수 황씨가 많이 거주하고 있는데, 이들 장수 황씨 집안과 관련된 황방촌영정, 열부 옥천육씨 정려, 효자 황민찬 정려 등의 문화유적들이 함께 상존하고 있어 이 지역과 장수 황씨 집안의 역사문화를 함께 느낄 수 있다.
 
 □ 화산서원 華山書院 진안군 향토문화유산. 안천면 백화리 906
 
화산서원은 황희(黃喜)의 영정을 안치하고, 그의 자손인 황보신(黃保身), 황징(黃澄) 등을 배향하고 있는 장수 황씨 집안의 사당이다. 황희는 조선 전기에 영의정 등 삼정승을 지낸 명재상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황보신은 황희의 둘째 아들로 한성소윤(漢城少尹)을 지냈다. 황징은 진안군 안천면에 세거하는 장수 황씨의 입향조로, 황희의 5대손이며, 호조참의(戶曹參議)를 지냈다고 한다.
 
화산서원은 1926~1927년 용담문묘 도유사 임병도(林秉棹)가 화산사(華山祠) 창건을 발의하여 건립되었으며, 1932년 사우 등이 완공되었고, 1970년 중수를 거쳐 지금에 이르고 있다. 사우의 중앙 상부에는 화산서원 현판이 있으며, 사우 내부에는 황희의 영정과 위패, 황보신과 황징의 위패 등이 모셔져 있다. 서원은 중리마을 남쪽 어귀에 위치하고 있다.
 
 □ 황방촌영정 黃尨村影幀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화산서원에 모셔둔 황희(黃喜, 1363∼1452)의 초상화로, 방촌(尨村)은 황희의 호(號)이며, 경북 상주의 옥동서원에 소장되어 온 것을 옮겨 그린 것이다.
 
초상화의 크기는 가로 54㎝, 세로 80㎝로, 비단 바탕에 채색하였으며, 초상화 속 황희는 오사모(烏紗帽)를 쓰고 쌍학흉배와 각대를 갖춘 관복차림의 반신상(半身像)이다. 얼굴 묘사에 있어서 콧날과 눈 주위에 음영을 가하여 요철(凹凸)을 표현하였으며, 흰색과 검은색이 섞여 있는 수염은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고, 관복의 옷 주름은 비교적 강한 선으로 표현되어 있는 모습이다. 영정은 구한말~일제강점기의 대표적 초상화가로 알려진 석지 채용신(蔡龍臣)이 모사하였다.
 
본래 상주 옥동서원의 초상화는 황희가 62세 되던 해에 그려진 것으로, 이를 옮겨 그린 그림이 약 5점 있었으나 전란 중에 대부분이 소실되고, 파주영당(坡州影堂) 등에 모사본이 전해오고 있다고 한다. 이들 모사본 중에서도 화산서원의 초상화가 가장 우수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어 화산서원의 황방촌영정이 황희의 국가 표준 영정으로 지정되어 있기도 하다.
 
 □ 열부 옥천육씨 정려 烈婦 沃川陸氏 旌閭 안천면 백화리 1496-1
 
육씨(陸氏) 부인은 임진왜란 중에 남편 황대성(黃大成)이 의병을 이끌고 전투에 나서자 몸종 천개[天介, 또는 천분(千分)]와 같이 상리(상배실)마을 앞 구례마을로 피난을 하였으나, 왜군에 잡히어 욕을 당하게 되자 적을 꾸짖으며 굴하지 아니하고, 몸종과 함께 자결하였다고 한다. 이 일이 알려지면서 1699년 조정에서 정려를 내렸다. 본래 이 정려는 하리(하배실)마을 앞 동산에 있던 것으로, 농로가 나면서 훼손되어 1980년 즈음에 현재의 중리(중배실)마을로 옮겼다고 한다.
 
육씨 부인의 남편 통정대부(通政大夫) 황대성은 임진왜란 때 수 백명을 이끌고 각지에서 왜군과 싸웠던 의병장으로, 일본에 포로로 압송된 뒤 천신만고 끝에 조선으로 돌아왔으나 부인 옥천 육씨가 순절한 것을 알고 뒤따라 자결하였다고 한다. 정려각은 화산서원 남서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내부에는 걸려있는 현판에는 ‘열부통정대부황대성처옥천육씨지려(烈婦通政大夫黃大成妻沃川陸氏之閭)’라고 새겨져 있다.
 
 □ 효자 황민찬 정려 孝子 黃玟燦 旌閭 안천면 백화리 1494-3
 
황민찬(黃玟燦, 1876~1905)은 현령 황동규(黃東奎)의 아들로, 품성이 순하고 후덕하여 부모에게 효도하며, 형제에 우애하고, 배우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그러다 어머니가 병이 났을 때 자신의 손가락을 상하게 하여 피를 내고, 이를 어머니의 입에 흘려 넣었는데, 이에 하늘이 감동하여 어머니의 병을 고쳐 목숨이 끊어지지 않고 소생하였다고 한다.
 
이후 황민찬이 요절(夭折)하게 되자 고을에서 애석하게 여겼고, 이에 용담향교 유림들이 청원하여 1905년 정려가 내려졌으며, 동몽교관에 추증되었다. 정려각은 화산서원의 북서쪽 길 건너편에 건립되었는데, 내부에는 걸려있는 현판에는 ‘효자학생증구품후임부중학교교관장수황민찬지려(孝子學生贈九品後任部中學校敎官長水黃珉燦之閭)’라고 새겨져 있다. /진안=양대진기자·djyang7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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