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순창읍 가남리 남산마을 귀래정
▲ 순창읍 가남리 남산마을 고인돌
▲ 순창읍 가남리 남산마을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때 가잠과 남산대를 합하여 가남(佳南)이라 하였다. 남산대는 옛날부터 마을이 형성되었던 비교적 큰 마을이다.
매화이발 형상으로 꽃봉오리처럼 된 곳에 형성된 마을이 가남리(佳南里)다. 가남리 대숲 속에 숨겨져 있는 지름 3m, 넓이 2.5m, 높이 0.6m 고인돌로 미루어 선사 시대부터 마을이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339년 문전공 인빈의 후손인 교동 인씨들이 들어와 조선 전기까지 살았다. 또한 고려조 순화백의 봉작을 받은 설자승의 후손인 순창 설씨가 살고 있다. 신말주는 세조가 조카인 단종을 내쫓고 왕위에 오르자 대사간 관직을 내놓고 처 순창 설씨의 고향인 이곳에 귀래정을 짓고 남은 생을 보냈다. 또한 안동 권씨 권효도 세조의 왕위찬탈 후 처향인 순창에 낙향해 이후 후손들이 세거하였다.
남산은 오산의 남쪽에 있는 산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경천과 양지천이 합류하여 가남리 가잠 마을 앞을 흐른다. 강천산에서 내려온 경천과 금과면에서 내려온 사천이 가잠 앞에서 합류하여 섬진강으로 흐른다. 가잠은 조선 세조때 신말주와 함께 낙향하여 남산에 살다가 대정으로 이사와서 살았던 선비가 개가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아 찾아보니 현 가잠마을에서 새끼를 낳았다는 전설이 있는 곳이다. 이때 노승이 이곳을 지나다가 명당으로 개가 잠자던 곳이라 개잠으로 불렀으나 조선 고종 때 가잠이라 하였다. 

순창 남산

전라북도 순창군 순창읍 가남리 남산 마을에 있는 산이다. 순창군의 진산으로 일컫는 오산의 남쪽에 있는 산이라 하여 남산이라 하였다. 현재는 가잠리와 남산리를 합해서 가남리로 변했지만, 일제 강점기인 1914년에 행정 구역이 통폐합되기 전에는 남산의 이름을 따서 행정 구역도 남산리로 불렀다. 풍수지리상 오산은 까마귀 형상이고, 남산은 파충류인 남생이를 상징한다고 한다. 남산은 남산대라고도 불린다.
산줄기는 백두 대간 장수 영취산에서 서북쪽으로 뻗어가는 금남 호남 정맥이 진안군과 완주군의 경계인 주화산에서 두 갈래를 친다. 주화산에서 북쪽으로 금남 정맥을 보낸 호남 정맥이 남진하며, 경각산, 오봉산, 내장산, 백암산, 용추봉, 추월산, 강천산, 금성산성의 산성산, 광덕산, 덕진봉을 거쳐 뫼봉에 이르러 호남 정맥과 갈라져 동쪽으로 뻗어 내린다. 그리고 223봉과 아미산, 배미산, 못토 고개를 지나 상여 바위가 있는 옥녀봉, 가산을 지나 남산을 솟구쳤다. 물줄기는 섬진강에 합수되어 남해의 광양만으로 흘러든다.
남산의 정상에서는 순창읍과 주변의 산들이 한눈에 조망된다. 북쪽으로 순창 시가지 너머 무이산, 성미산, 회문산이 있고, 서쪽으로는 광덕산, 추월산 너머 내장산 연봉들이 보인다. 남쪽으로 설산과 괘일산이 있고, 동쪽으로는 옥출산 너머 남원의 고리봉, 곡성의 동악산이 펼쳐진다.
해발 60m쯤 되는 남산 주위에는 노송이 우거지고 산책하기 좋은 산책로가 있다. 남산은 산이라기보다는 순창 시가지인 남산 마을에 있는 작은 동산을 연상시키는 곳이다. 남산의 동쪽에는 국도 24호선, 국도 27호선, 남쪽에는 광주 대구 고속 도로가 이어져 있고, 순창 시가지와 가남 농공 단지 등이 지척에 있다. 남산 좌측 언덕에는 순창이 낳은 대표적 시인인 권일송의 시비가 있다. 남서쪽 산자락에는 신말주 세거지가 있다. 동쪽으로는 순창 시가지와 섬진강의 지천인 양지천과 경천이 한눈에 들어온다.
남산 정상부에는 조선 시대 선비들이 학문을 논했던 귀래정이 있다.

설씨부인신경준선생유지

설씨부인 신경준 선생유지는 조선 중기의 문신 신말주와 부인 설씨부인을 비롯하여 신말주의 10세손 신경준 등 후손들이 태어나고 살았던 곳으로, 순창읍 가남리에 위치하며 면적 1,074㎡이다. 1996년 복원 사업이 추진되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이곳은 일명 신말주 후손 세거지로 알려져 있으며, 1994년 8월 10일에 전라북도 기념물 제86호로 지정되었다.
외삼문인 일관문을 들어서면 왼편에 만재 고령신공당식 공적비와 오천 신익휴공 공적비가 있다. 안채로 통하는 여견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자혜당을 비롯하여 우측에는 남애정사, 좌측에는 사당인 남산사, 남산사창건기의 비가 있다.
한편 유장각에는 문화재가 보관되어 있는데, 정면에 귀래정연혁비가 세워져 있고, 유장각 우측 편에는 충서당이 있으며, 충서당 뒤쪽에는 귀래정이 있다.
설씨부인(1429∼1508)의 본관은 옥천이다. 설백민의 딸로 이곳에서 태어났고, 후에 신말주와 혼인하였다. 신말주는 본관이 고령으로 세조대 훈신 신숙주의 아우이다. 1416년(세조 2)에 벼슬을 버리고 부인과 함께 순창의 처가로 낙향했다. 이후 이들의 후손이 이곳에서 대대로 살았다.
설씨부인은 문장과 서화에 능하였다. 1482년(성종 13)에 강천사 불사를 위해 쓴 권선문첩(보물 제728호)과 강천사를 그린 채화 14첩이 전해진다. 신말주의 후손인 신경준도 이곳에서 출생하였다.
신경준(1712∼1781)은 1712년(숙종 38) 신래의 아들로 태어났다. 자는 순민이고, 호는 여암이다. 해박한 지식과 더불어 학덕이 높았다. 26세가 되던 해인 1741년(영조 17) 소사로 이사해 순창을 떠났다.
1714년(숙종 40) 증광 문과에 급제한 뒤 휘릉 별검을 시작으로 성균관 전적에 올랐다. 1770년(영조 46) 장악원정에 올랐다. 이 때 영조는 8명의 문사를 뽑아 『문헌비고』의 편찬을 명했다. 그는 여기에 뽑혀 『여지고』의 편찬을 맡았다.
그 뒤 내외직을 두루 거쳐 제주목사를 끝으로 벼슬을 그만두었다. 1779년(정조 3) 고향인 이곳 순창 남산대 옛집으로 돌아와 지냈다. 1781년(정조 5)에 6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신경준은 문신으로서보다는 지리학과 언어학에 탁월한 업적을 남긴 조선 후기의 실학자로서 이름이 높다. 그는 『강계지』·『의표도』·『도로고』·『산경표』·『훈민정음운해』 등 많은 저술을 남겼다. 그의 유집으로 『여암집』이 있다.

귀래정

귀래정은 순창읍에서 옥과 방향으로 약 1㎞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한편, 순창군 순창읍 가남리 마을 어귀에 있는 신말주 유허비는 1455년 단종이 왕위에서 물러난 후 신말주[1429~1503]가 벼슬을 사임하고 귀거래한 장소임을 밝히는 표석이다.
1455년에 수양 대군이 단종의 왕위를 찬탈한 후 조선의 제7대 왕에 오르자 신숙주의 아우 신말주는 이에 불만을 품고 벼슬에서 물러나 순창으로 낙향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정자를 짓고 자신의 호를 따서 귀래정이라 하였다. 쇠락한 것을 1974년에 다시 고쳐 세웠다.
귀래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 팔작지붕 기와집이다. 건물 중앙에 방이 가설되어 있고, 3점의 ‘귀래정’ 현판이 걸려 있다. 2점의 현판은 측면에, 1점은 정면에 걸려 있다. 정면의 현판 옆에는 1930년에 신말주의 18세 방손 신덕선이 쓴 ‘한운야학’편액이 걸려 있다. 한운야학은 하늘에 떠있는 구름과 들에 노니는 학처럼 아무 속박없이 한가롭게 지내는 상황을 뜻한다.
귀래정 건물 내부에는 서거정이 지은 「귀래정기」와 강희맹의 시문 등이 액판으로 걸려 보존되고 있다. 주변에는 커다란 갈참나무가 있어 한결 운치를 더한다. 1975년 2월 5일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67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전라북도 문화재자료로 재지정되었다. 고령 신씨 종중에서 소유, 관리하고 있으며 관리 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귀래정은 신말주가 세조 등극의 소용돌이 속에서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 후 순창 십로와 더불어 한운야학의 심경으로 은둔 생활을 하던 신말주의 중심 무대이자 불사이군의 충절로 한평생을 살고자 한 올곧은 조선 선비의 혼이 깃든 550여 년의 오랜 역사를 간직한 유서 깊은 공간이다.

답포 고개

순창읍 가남리 남산 마을에서 대정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해발 96m의 답포 고개는 순창 읍내에서 남쪽으로 1.5㎞가량 떨어져 있으며, 남쪽에는 순창 가남 농공 단지가, 동쪽에는 순창 인터체인지 등이 입지해 있다. 답포 고개에서 광주 대구 고속 도로와 국도 27호선이 교차하고 있다.
답포 고개, 즉 베를 밟고 가는 고갯길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이 고개의 명칭 유래는 다음과 같다.
조선 연산군 때 일이다. 남산대에 사는 신말주의 장손인 신공제는 청렴결백하여 청백리로 유명하였다. 신공제는 대소과에 급제하여 병조 좌랑으로 있다가 1499년(연산군 5)에 능주 현령으로 부임하여 백성 위주의 선정을 베풀었다. 그는 세금을 감면해 주고 부역을 줄여주는 등 위민 애육을 실천하여 고을 백성으로부터 칭송이 자자하였다. 흉년이 들고 가뭄으로 농사를 망치면 백성과 더불어 죽물을 마셨으며 괴질이라도 번지는 날엔 관원을 동원하여 보살펴 주었다. 아무리 어려워도 공물에 손대지 않았으며 받지도 않았다. 이에 백성들은 신공제를 부모와 같이 따랐다.
1503년에 할아버지인 신말주가 수명을 다하자 신공제는 벼슬을 그만두고 향리인 순창 남산대로 돌아왔다. 이때 능주 백성들이 포목을 갖고 나와 바치고자 하였으나 신공제는 일절 받지 아니하였다. 백성들은 신공제의 귀향 행렬에 베를 짊어지고 따라나서 순창 남산대까지 이르렀다. 여기서도 신공제는 끝까지 사절하매 할 수 없이 신말주의 상여가 지나가는 남산대에서 신담리까지 십리 고갯길에 포목을 깔고 경배하기로 작정하였다. 연산군의 폭정이 민생을 도탄에 빠지게 하고 사회 기강이 해이해진 때였지만 그 길에 깔린 포목은 도적도 걷어가지 않아 오래도록 사람들에게 청백리 신공제의 선정을 알리는 증표가 되었다고 한다. 그 후부터 이 고개를 답포 고개라 부른다. 순조 때 전라 감사로 부임한 이서구는 신공제의 청백리 갈문에서 “전라 56고을이 모두 답포 고개여”라고 칭송한 적이 있다.

저작권자 © 전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