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들이 대접받는 세상" 보천교로 번성

정읍시 입암면 접지 동부마을 정성우 기자l승인2022.09.04l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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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9년완공한보천교십일전-일제는황와(黃瓦)를이었다는이유로지붕을헐게하였다.1936년에해체된십일전은현서울조계사대웅전이되었다

대흥리(접지리)는 본래 정읍군 서일면 지역이다. 1789년에 작성된 ‘호구총수’에 정읍군 서일면 대흥촌리라는 이름으로 나와 있어서 역사가 오래된 마을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1912년에 작성된 ‘지방 행정구역일람’에는 정읍군 서일면에 대흥(촌)리가 빠져 있는 것으로 보아 마을이 쇠락해졌음을 짐작할 수 있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는 입암면 접지리에 편입되었다.
접지리 동부와 서부가 분리된 시기는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1936년 장봉선 저(著) ‘정읍군지’에는 대흥동부와 대흥서부로 이름이 나온다.
주민들은 동서로 나눠 천원천 둔덕에서 거대한 용줄을 만들어 줄다리기하며 즐겼는데 그 후 마을이 분리되었다고 기억한다.
당시에 진등마을 앞 천변은 넓은 모래밭의 둔덕이었다. 이곳은 보천교가 활발할 때 주차장으로 이용됐다. 마을 안에는 하천이 많았다.
증산 강일순이 이곳에 머물며 도를 펴고, 고수부(고판례)가 태을교의 교문을 여는 동안 많은 사람이 모여들기도 했으며, 1911년 이후 증산의 제자인 월곡 차경석이 보천교 활동을 전개하면서 많은 교인이 모여들어 마을이 크게 번성하게 됐다.

차경석 교주가 대흥리에서 보천교를 포교하면서 1921년에는 전국 각지의 교인들이 엄청난 세력으로 확장해 나갔다. 일제의 강력한 탄압 속에서도 굴하지 않았으며, 일찍이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방대한 기구와 조직을 가지고 교전을 경영하여 한때 600만 교도를 거느리기도 했다.
보천교 이전 대흥리는 10여 호로 이뤄진 작은 촌락이었으나 교세의 엄청난 확장으로 전국에서 수많은 교도가 모여들어 700여 호에 이른 적도 있었다.

보천교의 창교 배경
보천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증산 강일순의 사상과 그를 따라 일생을 바친 제자들과 신도들로 구성된 증산계 신종교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그와 더불어 보천교를 창시했던 월곡 차경석이 선행하여 활동했던 동학운동에 대한 이해가 동시에 이뤄질 필요가 있다.

증산 강일순과 월곡 차경석의 만남
증산 강일순은 1871년 고부군(현재의 정읍시 덕천면)에서 출생했다. 증산이 태어난 고부군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의 발상지로 그는 동학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증산은 김개남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을 따라 청주까지 갔으며, 그때 동학군이었던 김형렬을 만났다. 증산은 동학농민전쟁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그의 혁명관은 해월 최시형에 가까운 비폭력 운동으로서 동학의 동세개벽과 대조적인 정세개벽을 주장했다.
그리하여 전장에서 만난 김형렬 등의 동학 신도들에게 전쟁을 피해 집으로 돌아갈 것을 강력히 권했다.
증산은 조선말의 가난한 지방 선비들이 그러했듯이 유학과 전통 의학의 기초를 닦고 훈장업과 의업으로 생업을 삼았다. 그런 가운데서 말세에 이른 세상을 변혁하여 백성들이 대접받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일념에 불탔다.
그 방편으로써 도를 통하고 세상의 운도를 바꾸는 천지공사를 진행한다고 주장했다.
갑오년, 진멸의 위기 앞에서 증산은 상당한 충격을 받았고, 그의 종교적 사상 형성에 많은 영향을 끼쳤음이 대순전경에 나타나 있다. 침략하고, 침략당하는 상극의 시대에 생장하여 유년기를 보내고 청년기를 맞은 인간 증산의 종교적 심상에 이 상극도수를 개조해야겠다는 개벽 염원이 심화되어갔다.
증산은 상극의 선천시대를 마감하고, 상생의 후천시대를 열기 위해 세상의 운도를 대개조하는 이른바 ‘천지공사’를 전개했고, 그의 제자들은 스승인 증산의 신력을 믿었다.

차경석은 본명이 윤홍이며 호는 월곡으로 1880년 지금의 고창군 부안면 연기동(선운사 입구)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인 차치구는 동학농민혁명의 최고 지도자인 전봉준을 피체지인 순창 피노리까지 수행했던 동학 접주이자 장령이었다.
차경석은 아버지가 흥덕현감에게 죽음을 당하자 14살의 어린 나이로 부친의 시신을 업어다 집으로 모셔와 장사를 치렀다. 1899년 기해농민봉기에 참여했고, 그 자신도 장성에서 죽음의 위기에 처했다가 풀려나온 일도 있었다.
차경석은 1907년 5월 17일 전주 가는 길에 김제 금구면 거야주막에서 강증산을 운명적으로 만나 새로운 길을 걷는다. 
건장한 체구에 뱃심이 두둑하였고, 전국에 이름이 알려져 1926년에는 당시 총독인 사이토 마코토[齋藤實]가 직접 정읍 본부로 찾아와 면담할 정도였다.

보천교는 강증산의 유훈 실천에 노력했다. 강증산의 유훈인 지상 선경사회 건설을 저해하는 식민지 체제를 극복하는 방안으로 한국의 독립을 기도하고 교금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유용했다. 이것이 1921년경 일제의 보천교 탄압 명분이 되었다.
한국민족운동사에서 보천교가 차지하는 비중이 만만치 않다. 일제는 치성금 등으로 모인 보천교 교금의 독립운동 자금 유입 동향을 예의주시했다.
임시정부 주석 김구는 광복 후 정읍을 찾아 “정읍에 빚진게 많다”고 얘기했다. 이는 보천교를 통한 독립운동자금 제공이 임시정부 활동에 많은 도움이 됐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보천교는 전국 각지에서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을 안고 모여든 자들로 이뤄진 신앙 공동체라는 점에서 이는 폭넓게 해석해야 할 필요가 있다. 독립을 위해 가문과 자신을 희생한 애국지사들 다음으로 민족 종교운동에 참여해 인적, 물적 자원을 아낌없이 제공한 평범한 사람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보천교의 세력이 커지자 일제는 교단에 대한 탄압을 가하는 한편, 회유하기 시작했다. 차경석은 종교활동을 보장받기 위해 조선총독부 정무총감과 내각 총리대신에게 친일 사절을 파견하는 한편, ‘시국대동단(時局大同團)’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전국토를 순회하면서 보천교의 소개와 함께 대동아단결(大東亞團結)을 강조하는 친일적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자, 이에 반대하는 보천교 혁신운동이 일어났고, 고위 간부들이 신도를 이끌고 별도의 교단을 세우는 사태가 일어나게 되어 교세는 크게 약화 되기 시작했다.

1936년 교주인 차경석이 죽은 뒤 조선총독부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는데, 당시 헐린 보천교 본소 십일전 건물은 조계사 대웅전 건물이 되었으며, 보화문은 부안 김상기 씨의 집이 되었다가 내장사 대웅전이 됐다.
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도 입암면 대흥리 보천교 본소에서는 매년 다섯 차례씩 교인들에 의해 치성식이 올려지고 있는데 영정은 모시지 않고 방안에 12층의 나무탑을 놓고 식을 올리고 있다.

대흥리에는 1920년경부터 직물공장이 들어서기 시작해 90여 개가 호황을 이뤘으나, 지금 쇠퇴해 20여 개 업체가 거즈, 소창, 개량 한복의 재료를 생산하고 있다. 
현재 접지리에는 보천교 석축 담장 일부가 남아있다. 담장은 도로에서 보았을 때 최고 높이가 1.80m이고, 평균 1.54m이다. 이 석축 담장은 가로 21~33cm, 세로 30~38cm 가량의 쐐기형 돌을 접착제로 위아래가 절반쯤 겹치게 외벽과 내벽을 쌓았고, 내외벽 사이에는 콘크리트를 채워 넣었다.


정성우 기자  js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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