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너무 위대한 똥 / 내게 너무 이쁜 똥 / 내게 너무 예쁜 똥

윤중강

똥,덩.어.리. 드라마 ‘베토벤바이러스’에서 오케스트라 지휘자 강마에가 실력이 부족한 단원에게 내뱉는 독설이다. 똥이란 단어는 이렇게 부정적인 것과 연결된다. 이 단어를 사용하는 것을 매우 무례하고 천박하게 생각하는 경향도 있다. 초등학교 시절이 생각난다. 대변검사를 할 때도, 우리는 똥이란 단어를 마치 금기어처럼 생각했다.
그러나 세월은 변했다. 지금 어린이 도서를 보면, 똥에 관한 책이 많다. 재미와 의미를 동시에 만족시켜 준다. 이런 책을 읽고 자란 아이들은 똥을 눈 후에 자신을 똥을 바라본다. 손을 흔들며, 이렇게 말한다. “안녕, 잘 가” 마치 친구와 작별인사를 나누듯이, 똥에게도 그런 인격(?)을 부여한다.
김지하가 생각난다. 일찍이 생명사상에 설파한 그는 ‘밥’을 통해서 인간세상의 자연스런 순환을 논했다. 밥→똥→흙→밥→똥, 이것이 삶의 자연스런 순환을 얘기했다. 생각해보면 우리말에서 중요한 단어들은 모두 한 음절이다. 밥, 똥, 흙이란 단어가 ‘자연’을 대변하는 것이라면, 굿, 춤, 꿈과 같이 ‘문화’를 함축하는 단어가 있다. 21세기에는 자연친화적인 삶이 더욱 중요하다. 밥과 똥과 흙이, 굿과 춤과 꿈으로 아름답게 만나야 한다. 똥에 관한 유쾌한 어린이도서가 있는 것처럼, 똥에 관한 통쾌한 뮤지컬도 나와야 한다. 쾌변(快便)은 쾌뇌(快腦)의 근원이다! 똥에 관한 불쾌한 생각을 지울 때, 삶은 더욱 상쾌해질 수 있다.
우리는 순수한 우리말을 사용했지만, 아울러 한자문화권에 속했다. 한자를 보면서 새삼 감탄한다. 한자문화권에 속한 이들이 얼마나 생각이 깊은가에 새삼 놀란다. 똥과 관련된 한자어로 분(糞)이 있다. 쉽게 이 글자를 나눠보면 쌀(米)이 변한(異) 것이다. 그런데 좀 더 나누면, 이것은 미(米), 전(田), 공(共)으로 세 글자로 나눠 생각할 수 있다. 사람들이 잘 먹고, 열심히 일하면서, 더불어 살아가는 모습을 분(糞)이란 한 글자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변(便)이란 단어 속에도 오묘함이 있다. 변은 사람 인(人)변에 다시 갱(更), 고칠 경(更)을 쓴다. 철학적으로 생각한다면, 인간은 결국 날마다 변을 보면서 계속 새롭게 거듭나야 하는 사명이 띠고 있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것을 아는가? 똥오줌 변(便)자가, 또한 편할 편(便)자라는 사실! 잘 먹고 잘 살려면, ‘잘 싸는’ 법부터 익혀야한다.
한자어를 통해서도 똥의 철학이나 똥의 미학을 알게 되지만, 나는 우리의 고유어 ‘똥’이란 단어가 진정 위대하게 느껴진다. 똥이란 한 음절을 발음해보면, 그대로 ‘똥’이란 존재가 그대로 느껴지지 않는가! 만약 똥을 ‘동’이거나 ‘뚱'이라고 발음한다면 얼마나 시시할까? 그 옛날 누구처럼 똥을 처음 똥으로 하자고 했던가! 쌍디귿(ㄸ)이라는 된소리는 똥의 그것처럼 응축된 느낌이다. 음식물이 우리네 뱃속에 들어가서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사명을 다한 당찬 모습을 닮았다. ‘ㅗ’라는 양성모음은 밝고 가볍고 빠른 느낌이다. 마치 똥이 이제 항문을 통해 상쾌하게 방출되는 느낌이다. 마지막은 이응(ㅇ)은 제 사명을 다한 숭고한 결과물처럼 보인다.
나는 ‘똥’하면 두 사람이 생각난다. 첫 번째는 일본의 소설가 타니자키 준이치로(谷崎潤一郞, 1886-1965). 그는 음예(陰?)론으로도 유명하다. 음예는 한마디로 설명하기 어렵지만, 밝음과 어둠이 공존하는 공간으로, 일본적인 미학이 담겨있다. 타니자키는 음예의 대표적인 공간으로 변소를 꼽았다.
두 번째는 한국의 동화작가 권정생(1937-2007). 그의 ‘강아지똥’은 숭고하다! 스스로 하찮은 존재라고 여겼던 강아지똥이 스스로의 가치에 대해 고민하다가 마침내 소중한 일을 이뤄낸다는 이야기다. 강아지똥에는 삶에 대한 진지한 물음이 담겨있다.
우리 몸에서 손보다 발이 차별을 받을 수 없듯이, 밥은 위대하지만 똥은 그렇지 않다는 논리는 잘못된 것이다. 똥과 친해지고, 똥에 솔직해지자! 일찍이 똥의 활용법을 알았던 동아시아 농경민족의 후예답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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