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연차 리스트와 전직 대통령

남준희 변호사/전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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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중남부에 있는 조지아주(州)의 시골마을 플레인즈에서 땅콩농장을 경영하던 지미 카터가 조지아 주지사를 거쳐 1976년 제39대 미국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을 때 미국인들은 그가 선거공약으로 내세운 도덕과 인권 및 평등의 정치에 대하여 많은 지지와 성원을 보냈다.
이른바 조지아사단이라 불리는 참모진을 이끌고 백악관에 입성한 지미 카터의 모습을 보고 미국의 진보진영은 물론 일반 국민들도 지미 카터가 미국의 새로운 모럴과 비전을 제시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지미 카터에 대한 미국민들의 열광적인 환호가 냉소적인 실망으로 바뀌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는 프랭크린 루스벨트 이후 처음으로 민주당이 상, 하 양원을 장악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백악관 참모진과 의회지도자들의 불협화음으로 국정운영에 있어 의회와의 마찰을 자주 빚는 등 조지아 촌놈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였다.
지미 카터의 재직기간 동안 미국은 대내적으로 통화팽창 및 금리의 상승으로 인하여 자동차 등 전통적으로 강세에 놓여 있던 제조업 부분의 경쟁력이 악화되고 무역수지가 엄청난 적자를 기록하였으며 실업율이 급증하였다. 대외적으로는 중국과 수교하고 소련과 전략무기제한협정을 체결하는 등 냉전을 종식시키고자 노력하였으나, 일방적인 군비축소와 평화주의 일변도의 대외정책을 꿰뚫어 본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도록 하는 실수를 범하기도 하였다. 지미 카터는 박정희의 장기집권과 인권탄압을 이유로 주한미군을 철수하겠다고 공언하여 오랜 동맹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한국과 불편한 관계를 초래하기도 하였으며, 도덕적인 이유를 들어 CIA 등 정보기관의 해외공작역량을 대폭 축소하였다가 이란에 이슬람 근본주의 정권이 들어서는 것을 지켜보기만 하는 수모를 겪기도 하였다. 1979. 11. 이란의 과격파 이슬람교도 학생들이 테헤란의 미국 대사관을 점거하고 전쟁중에도 면책특권이 보장되는 외교관들을 인질로 잡아 살해위협을 하는 치욕을 미국에 안겨 줬는데도 카터 행정부는 뾰족한 대책도 없이 우유부단하게 대응하여 국제사회로부터 창피를 당하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남북전쟁을 막지 못해 미국 연방의 분열을 초래할 뻔했던 제임스 뷰캐넌과 함께 미국 역사상 가장 무능한 대통령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쓴 채, 1980년 대선에서 위대한 미국의 건설을 외치는 공화당의 로널드 레이건에게 참패한 다음 쓸쓸하게 향리인 플레인즈의 땅콩농장으로 귀향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러나 지미 카터는 대통령 퇴임 이후 전직 대통령이라는 사회적 신분을 십분 활용하여 소외되고 가난한 빈민층을 위한 활발한 사회활동에 뛰어 들어소외된 계층에 대한 사회적인 관심과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무주택자들에게 집을 지어 주는 해비타트 운동도 지미 카터의 적극적인 홍보와 참여로 전국적인 호응을 얻을 수 있었는데, 미국인들은 70세가 넘는 노구를 이끌고 주택 건설현장에서 노숙을 마다하지 않고 직접 망치를 들고 벽돌을 쌓는 지미 카터의 헌신과 봉사를 목격하면서 현직 대통령 시절과는 차원이 다른 감동을 느꼈다. 지미 카터는 뿐만 아니라 기아에 허덕이는 아프리카 난민들의 구호활동에 앞장섰을 뿐만 아니라, 르완다 종족분쟁과 다르푸르를 둘러싼 수단의 내전 등 인종과 종교 그리고 이념을 둘러싼 지구촌 분쟁지역(핵문제를 둘러싼 미, 북한 간의 갈등 속에서 특사로 평양에 가 김일성을 설득하기도 하였다)에 미국 대통령 특사로 다니면서 평화협약을 이끌어 내는 등 세계평화에 기여한 공로로 퇴임 20년 후인 2002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지미 카터는 위와 같은 퇴임 후의 눈부신 활동으로 지금은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전직 대통령이란 찬사를 듣고 있다.

최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측근으로 알려진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에 대한 검찰 수사가 연일 언론에 대서특필되고 있고 정치권 일각에서는 최종적으로 노 전 대통령에 대한 수사가 필요하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얼마 전에는 ‘봉하대군’이라는 이름을 얻은 노 전 대통령의 친형이 권력형 비리와 관련하여 구속되었는데, 이번에는 박회장으로부터 금품을 수수한 혐의로 노 전 대통령의 많은 측근인사들에 대한 전방위 수사가 진행되고 있고, 그 불똥이 부산, 경남 지역 관계와 법조계로 까지 번지고 있는 양상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식 대통령제를 받아들인 다른 신생국가들과는 달리 경제발전과 평화적인 정권교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우리 헌정사에서 유독 정권교체시마다 전직 대통령과 관련한 스캔들이 끊이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 곰곰 생각해 본다. 권력을 쥔 대통령 측근들의 위법행위가 퇴임 후 뒤늦게 불거진 것인지, 특정 대통령의 인맥과 무관하게 권력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한 기업인의 전방위로비의 파편이 전직 대통령에게 까지 튀고 있는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전직 을 존중할 줄 모르는 후진적 정치문화의 한 단면인지 가늠할 수 없지만, 우리나라도 미국의 지미 카터처럼 퇴임 후 국민들로부터 진심으로 존경받는 전직 대통령을 언제쯤이면 볼 수 있을까 문득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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