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축제가 미운 일곱 가지 이유

윤중강 / 국악평론가, 소리축제 연구위원

1. 아직도 정체성 타령이다.
전라북도 주최로 열리는 전주세계소리축제! 판소리가 중심인건 당연지사(當然之事)! 판소리를 중심에 두고 외연을 넓히는 건, 축제를 만드는 사람들의 몫이다. 그럼에도 새삼스레 정체성을 들먹이는 사람의 속내가 궁금하다. 결국 자신이 소속된 집단의 장르적 이기주의 때문 아닌가? 우리 모두, 솔직해지고 순수해지자.

2. 비전을 제시하지 못한다.
내년이면 10년이다. 이제 소리축제만의 독창성, 소리축제만의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다른 축제와는 다른 소리축제만의 개성이 요구된다. 보다 전향적인 자세가 아쉽다. 한국전통예술의 창조와 확산에 초점에 맞춰야 한다. 한 해에 단 한 가지라도 만족하겠다. 다른 공연과 차별되는 작품(킬러 콘텐츠)을 만들어서 한국과 세계에 널리 알려야한다.

3. 외지인은 외롭다.
소리축제는 ‘지역민의, 지역민에 의한, 지역민을 위한 축제’인가? 만약 그렇다면 할 말 없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세계’를 향한 축제라면, 지금의 소리축제는 여러 면에서 닫혀 있다. 일단 타 지역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아쉽다. 축제에 대한 호기심이 생겨서 전주에 오도록 하는 동인(動因)이 약하다. 아울러 일단 왔더라도 공연이 펼쳐지는 시간대 외에, 보고 즐길 프로그램이 부족하다. 축제에서 외롭고 심심하다면, 이건 분명 문제다. 밤늦은 시간, 불 꺼진 공연장을 바라보면서, 교통편을 걱정했던 사람이 나만은 아니었으리. 진정 축제라는 말이 무색했다.
밤낮없이 살아있는 축제의 공간을 만들어낼 순 없을까? 국악과 축제와 문화에 대해 열띤 토론을 하면서, 공연의 참여자와 관객들이 함께 즐겁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시공(時空)을 마련해야 한다. 지금처럼 공연이 끝나고 나면, 공연자들이 짐 싸들고 자신의 고향으로 가기에 바빠선 곤란하다.

4. 아카데미즘에 연연하다.
소리축제 속 학술대회의 성격의 행사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예전 방식이라면, 구색 맞추기에 불과하다. 양과 질에서 모두 함량미달이다. 참여하는 사람이 너무 적다. 어떤 해에는 발제자와 질의자도 제대로 참석하지 않았다. 논의되는 내용도 생산적이지 못하다. 아카데미즘보다 오히려 저널리즘에 초점을 맞춰서, 대중적인 인지도를 보다 높이는 축제로 거듭나는 편이 훨씬 효율적이다.

5. 해마다 진화하고 있는가?
소리축제의 슬로건이 마음에 와 닿지 않는 것은 나만이 아닐 거다. 어느 해엔 설득력을 잃은 표어와도 같았다. 역사적인 맥락을 바탕으로 해서, 시대적인 흐름을 이끌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역량이 축적되어야 한다. 축제는 반드시 진화되어야 한다. 전통예술 혹은 기존 예술을 바탕으로 해서, 우리의 예술의 새로운 ‘변이 - 적자생존 - 세대유전’의 흐름을 소리축제가 이끌어내야 한다. 소리축제가 한국음악 진화의 주체가 돼야 한다.

6. 축제의 주인은 누구인가?
내가 소리축제의 손님된 입장으로 갔을 때, 과연 소리축제의 주인이 누군지 걱정스러웠던 적이 적잖다. 축제를 기획, 실행하는 주체자에게서 주인의식과 창조의식을 발견하기 힘들었다. 그런데 그건 그들 탓만은 아니다. 이른바 지원을 하되 간섭은 하지 않으면서, 축제 전문가들에게 ‘믿고 맡기는’ 것에 매우 인색했다. 축제를 주관하는 사람이 신나야, 축제에 구경 간 사람도 신난다. 동서고금에 통하는 ‘축제의 진리’다!

7. 축제와 공연은 다르다!
소리축제여, 제발 이 말만은 명심해 주시라. 공연과 축제는 다르다. 올해의 소리축제는 꼭 ‘공연물의 조합’이라는 평가에서 벗어났으면 한다. 공연을 보는 이유는 일상의 여유를 찾고자 함이다. 반면 축제에 가는 이유는 ‘일상의 일탈’을 경험하기 위해서다. 축제는 궁극적으로 ‘잘 노는데’ 있다. 사실 떠들썩하고 즐겁다는 잘 놀았다는 측면에서, 지난해에는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다. 이런 여세를 몰아서 올해는 닷새 동안(9. 23 - 27) 얼마나 알차게 놀고 즐길 수 있게 될까? 조직위원장에서 자원봉사자까지, 소리축제를 찾은 외지인에서 외국인까지, 모두 모두 신명나게 노는 축제를 상상해본다. 소리축제 아자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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