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우 전후의 주말이었다. 바람도 쐴 겸 전주 시가지를 벗어나기로 했다. 한 친구의 승용차를 이용한 3인 행각이 되었다.
 나간 김에 점심먹이도 그 지방의 특미를 즐기기로 하였다.
 ‘어디가 좋을까’. 우리의 뜻은 곧 정읍의 태인 쪽으로 모아졌다. 나는 저 곳의 ‘한정(閒亭·칠보면 무성리 원촌)’과 고들빼기김치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다.
 ‘한정’을 처음 찾아본 것은 10수년전의 일이다. 저때 나는 ‘전북의 누정(樓亭)’답사를 계획하여 그 첫 번째로 ‘한정’을 택했었다. 저때나 이때나 나는 ‘한정’의 이름에 매력을 느낀다. ‘한정’에는 한가하고 조용하고 편안하고 느긋한 휴식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이라는 뜻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전주에서 한시간이 채 못 걸리는 거리를 차로 달리는 동안 주변 경치에도 젖을 수 있었다. 길가에는 개나리, 산기슭에는 진달래, 산에는 산벚꽃들이 미감을 돋우어 준다.
 신라말기 태인 태수를 지낸 최치원(崔致遠), 조선조의 15세기 태인에서 만년을 지낸 정극인(丁克仁), 이 어른들의 풍류로운 삶에 생각이 미치기도 한다.
 수월스레 전주를 벗어나 구이면 원기리를 막 지나서였다. 길옆의 한 골짜기가 까맣게 불탄 흔적이다. 언제 이 곳에도 산불이었던가. 옆자리의 친구가 바로 엊그제의 일이라고 한다. 그동안의 가물 탓도 있지만 올 봄 들어 별나게 많은 산불이 잇달았다. 며칠 전의 뉴스였던가. 4월 들어 140건의 산불이었다고 하니, 이는 ‘푸른 산에 꽃이 타는 듯 붉은 것(山靑花欲然)’이 아니라, 우리의 4월 산은 타오르는 불꽃이었던 셈인가.
 이윽고 차는 무성리 원촌에 이르렀다. 10여 년 전 이곳을 처음 찾았을 때와는 어디가 어딘지 모르게 많이도 달라졌다. 먼저 ‘한정’이 눈에 띄질 않는다.
 ‘금강산도 식후 경’이랬다. 먼저 끼니부터 챙기기로 했다. 가늠하였던 곳의 ‘한정’은 눈에 띄지 않았으나, 저때 ‘한정’을 살피고 나온 길목에 있었던 ‘무성식당’은 바로 찾을 수 있었다. 고들빼기김치의 쌉싸래한 맛을 되 챙기며 식당 문을 들어섰다.
 차림표에서 ‘물고기탕’을 주문하였다. 처음 길엔 ‘백반’이었으나, 이번엔 이곳 명물이라는 물고기탕을 즐기기로 한 것이다. 상차림에는 고들빼기김치가 없다. 이를 챙기자, 요즘엔 손이 많이 쓰이는 그런 김치를 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아쉬운 대로 물고기탕 만으로 점심을 달게 마쳤다.
 문밖에 나서서 다시 이곳의 원·근경(遠近景)을 바라보았다. 지금은 새로운 건물들 여기저기 서있지만, 둘러있는 산수의 경치는 아름답다. 지난날의 선비들이 가히 소요음영(逍遙吟詠)을 즐길만한 곳이었거니 상상이 가고 남는다. 그래, 이 지역엔 정자들도 많았던 것이려니 싶다. 송정, 후송정, 영모정, 감운정 등등.
 정극인의 ‘상춘곡가비’를 둘러보고 송정에 올랐다가 내려오는 길의 오른편에서 또한 정자를 볼 수 있었다. 새로운 기와가 올라있고, 높고 두툼하게 담장을 두르는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다가가 보니, ‘한정’이라는 큼직한 현판이 걸려있지 않은가. 원래의 ‘한정’을 이곳으로 옮겨 규모를 크게 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원 ‘한정’의 한한(閑閑)한 멋은 찾아볼 수 없었다. 무성서원 앞 들녘에 새로 세워진 ‘태산선비문화사료관’도 규모에 비하여 내용이 빈약하다는 생각이었다. 하긴 이 일대를 정읍시에서 ‘태산선비문화권’으로 계속 가꾸어 가리라고 하니, 뒷날에 기대를 걸지 않을 수 없다.
 몇 군데 더 둘러보고 싶은 곳도 뒷날로 미루고 회로에 올랐다. 어느 선비의 말씀이었던가. ‘더불어 겨루지 않으면 마음 항상 고요하고, 공(公)을 위하여 사(私)를 없이하면 꿈 또한 한가롭다(與人不競心常靜 爲公無私夢亦閒)’를 되새김해 보기도 하였다.
 나들이 날씨는 좋았으나, 들녘은 가물에 목이 말라 있었다. ‘춘수만사택(春水滿四澤)’은 도연명의 시구에서나 찾을 것인가. 모내기철은 다가오는데 논밭엔 흙먼지가 날리고 있으니 안타깝기만 하다.
 우리에게 상춘곡은 아직 먼 것이런가. /최승범·고하문예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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