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레지란 우리말로 비가 혹은 만가, 애가 등으로 번역된다. 말 그대로 슬픈 노래다. 고대 소아시아 애도가 양식이 발전해 로마와 독일 시인들에게 전해지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근대에 이르러서는 가까운 사람의 죽음이나 불행 또는 실연의 슬픔 등을 읊는 하나의 시형식이다. 릴케의 <두이노의 비가>는 최고의 엘레지로 꼽힌다. 우리나라에서는 다소 다른 뉘앙스로 가수 이미자의 노래를 엘레지로 친다. 어쨌든 엘레지는 세상의 무정함과 가혹함에 대한 슬픔이 밴 시형식이다.
그런데 요즘 지방정치계에 엘레지가 여기저기서 흐르고 있다. 지방에서는 파워엘리트로 통하는 지방자치단체장이나 지방의원들이 내년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착잡한 심경을 토로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 달 도내에서 벌어진 국회의원 재보선 선거. 민주당 텃밭인 전북에서 2석 모두 무소속이 차지하는 결과가 나왔다. 정동영, 신건 후보는 민주당 공천 후보를 누르고 배지를 달았다. 지방에서는 고래 싸움이다. 그런데 이 와중에 새우등이 터지고 있다. 바로 지방의원들이 갈 곳을 몰라 헤매고 있는 것이다. 국회의원들이 이들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현실에서 어떤 줄을 서야 내년 지방선거에서 살아남을까 하는 고민이다.
겉보기엔 소속 정당인 민주당에 충성하는 것이 옳은 길이다. 하지만 사정이 그리 단순치 않다. 정동영, 신건 의원이 곧 민주당에 복당할 움직임도 있다. 또 지역구 국회의원의 위력을 무시할 수도 없다. 더욱이 자당 후보 선거운동에 직접 뛴 지방의원들의 당혹감은 더 클 수밖에 없다. 그렇다보니 양쪽 모두에게 '보험'을 드는 눈치 빠른 사람들도 있다고 들린다. 지방자치단체장 역시 고민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이래저래 도내 지방정치인들은 잠자리가 편치 않다.
이런 애처로운 모습은 전국적이다. 지난 3월 국회에서는 '기초 지방선거 정당공천제 폐지를 위한 국민운동본부' 출범식이 개최됐다. 전국 시장군수협의회와 시군의회 협의회, 시민단체 등이 대거 참석했다. 곧 1천만인 서명운동도 추진한다. 이 출범식에서 나온 선언문은 이렇게 말했다.
"기초단체장과 기초의원은 지역의 살림살이를 챙기고 생활 정치를 펼치는 지역의 대표 일꾼"인데 "그러나 지역 국회의원이 공천권을 행사하는 현행 정치구도와 공천이 곧 당선이라는 현행 선거제도 하에서 주권자인 주민은 일꾼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포기하도록 강요받고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지방자치가 중앙정치에 예속돼 정쟁과 탐욕의 희생물이 되고 있다는 외침이다. 그래서 적어도 기초 지방선거만이라도 정당공천제를 없애자는 주장이다.
하지만 칼자루를 쥔 국회는 냉랭하다. 민주당 김종률의원이 제출한 기초단체장과 기초의원 정당공천 배제를 규정한 공직선거법 개정안은 폐기 직전이다. 국회의원들로서는 자신의 영향력을 위축시키는 법안이 마뜩찮은 것이다. 앞으로의 전망도 어둡다. 국회의원 대다수가 공천권을 놓지 않으려 한다는 것이다.
중앙정치가 지방정치를 주무르면서 풀뿌리 지방자치는 아직도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다. 비리와 부정부패, 매관매직, 협잡 등등 지방정치도 질 나쁜 중앙정치의 축소판으로 전락했다. 실제로 공천헌금 등 갖가지 범죄로 사법 처리되는 지방의원들이 줄을 잇고 있다. 주민 역시 이 사정을 잘 안다. 그래서 지방선거 투표율은 늘 바닥이다. "해봤자 뻔하다"는 정치적 허무주의가 깔려 있다.
마냥 이렇게 갈 수는 없다. 지방자치는 어떻게든 살아나야 한다. 국회의원들이 바뀔 가망성은 없어 보인다. 해결책은 아무래도 피플파워일 것 같다. 기초선거 정당공천 배제 1천만인 서명운동은 그래서 호기이다. 국회의원들에게 온 국민들이 압력을 넣어야 한다. 국민들의 힘으로 지방정치인의 국회의원 하수인 노릇을 막아야 한다. 더 이상 지방정치인 엘레지가 울리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중앙정부의 지배에도 넌더리가 나는데 국회의원들 손에까지 놀아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지방 자치 잘못되면 그 피해는 온전히 주민들 앞에 떨어진다. 지방 사람들이 정신 차려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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