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람 시조 계승과 동상의 돌판 연보 오기 문제

박영학(원광대 교수. 시조시인)

가람은 익산시 여산면 태생이다.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국문학자이자 시조 혁신 및 창작에 일가를 이룬 시인이다. 대학 강단에 선 가람은 전북대 문리대학장을 지냈다.
시조계가 가람의 업적을 기려『가람시조문학상』을 제정 시상하던 것을 2000년부터 익산시가 이어가는 중이다.
정지용은 1930년대 식민지 조선의 문단 30년 역사 속에서 “시조학은 가람으로서 부터 비로소이다”라고 썼다. 질과 양으로 보더라도 가람의 오른편에 앉을 사람이 없다는 평과 함께 정지용은 “송강 이후 가람이 솟아 오른 것이 아닐가 한다.”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런 가람의 시조역사상의 위상을 고려하여 익산시는 여산면 원수리 진사동 ‘수우재’(守愚齋)를 보존하고 있다 수우재 곁에는 동상이 서 있다. ‘수우재’는 가람 생가의 당호(堂號)이다. 방문객의 편리를 위해 수우재 앞마당에 주차장을 넓게 설치하고 동상 곁에 세운 지역유지들이 세운 기념비석을 주차장 쪽을 내려 앉혔다.
그런데 동상 곁에 세운 가람의 연보를 새긴 판석이 문제이다. 가람이 첫 시집을 낸 것은 소화 14년 8월15일이다.『가람시조집』이다. 문장사(文章社)에서 냈다. 그 당시 문장사는 “경성부 종로 韓靑ビル內”였다. 진체구좌는 ”京城 25070번”이다. 책값은 1원50전, 우편료는 9전으로 표기되어 있다. 경성은 일제 총독부가 ‘서울’을 개명한 명칭이다.
첫 시집을 낸 소화(昭和) 14년은 서기 1939년이다. 그런데 수우재에 세운 동상 옆 판석에는 1940년으로 잘못 환산되어 있다. 1939년의 잘못이다.
1975년 2월 삼중당에서 펴낸 이병기 저『가람문선』에 밝힌「이병기 연보」에도 “1939년(49세)//《嘉藍時調集》을 文章社에서,《歷代時調選》/을 박문서관에서 간행. 동아일보 학예면의 시조란을 담당하여 독자들의 시조창작을 지도/하다.”라고 적고 있다. 동상 연보에 새긴 1940년은, 가람문선에 따르면, “보성전문학교에서 종래의 歌樂에 대하여/특강.//《인현왕후전》간행.”이라고 적혔다. 첫 시조집은 다시 1947년에 백양당에서 재판되었다.
한국에서 태어나 현대시조를 공부하는 사람치고 가람의 무게를 모르는 시인은 없다. 가람을 낳은 익산의 자랑만이 아닌 시조계의 거목이다.
정지용이 지적했듯 시조의 특색은 자수(字數) · 장수(章數)의 제한 때문에 장정적(章程的)인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시형의 제약적 부자유를 통하여 시의 절조적(絶調的) 자유를 추구할 수 있는 유구한 악기적 성능에 있다.
시조는 정형시(fixed of verse)이다. 틀이 고정된 시라는 뜻이다. 가람시조집의 그 어느 구석에도 3장 6구의 기본형이 흔들린 적은 없다. 다만 평시조와 함께 에 연시조 또는 연작을 쓰자고 제창한 것은 평시조가 담을 수없는 거대 담론(grand narrative)을 소화하는데 필요한, 고시조 혁신인 셈이다.
시대에 따라 시조는 변할 수 있다. 그러나 형식은 아니다. 형식이 파괴되는 순간 그것은 정형시가 아니다. 냉용의 효과적인 전달을 위해 또는 다른 이유로 행을 바구 뒤트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정격을 벗어난 시조가 활개를 친다. 심지어 수와 수의 구분마저 무시하는 연시조가 횡행한다. 평시조 정격 파괴는 이미 노산 이은상의 양장 시조(2줄)와 이명길의 절장시조(종장 1행) 실험을 끝으로 종지부를 찍은 지 오래이다. 그런 시조계의 오랜 전 경험이 새삼스럽게 또 다른 모습으로 실험되고 있다. 시조계는 언제까지 형식 실험에 매달릴 것인가. 그런 파격을 무턱대고 따르는 것이 어제 오늘의 현실이다. 지하에서 가람이 웃을 일이다. 1930년대 시조계에 이미지즘을 원용했듯 지금의 과제는 내용의 혁신일 것이다.
가람은 죽는 날까지 정형시를 썼다. 가람의 몇 가지 유산 가운데 우리가 지금 지켜야할 첫째 과제일 것이다. 가람을 두고 더 말할 무엇이 남아있다면 오직 가람의 시조 유산을 잘 모시는 다짐뿐이다. 가람 동상에 곁들인 연보의 잘못 표기가 부끄러운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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