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7월27일 런던에서 올림픽이 열린다. 전북출신이거나 전북을 연고로 한 선수들이 태극마크를 달고 전북과 한국의 명예를 걸고 금메달에 도전한다. 전북에서는 선수와 지도자 20여명이 런던올림픽에 나선다. 이들 가운데 전영천 고창군청 감독은 국내에 유일하게 심판으로 런던에 간다.

△런던올림픽 유도 결승전 심판을 보다=오는 7월 영국런던에서 열리는 올림픽 유도 결승전이 전 세계에 중계되고 있는 가운데 한판인지 여부를 놓고 심판의 판정에 눈이 쏠리고 있다. 전영천(고창군청 감독) 국제심판은 선수들의 순간적인 동작에 따라 파란도복의 선수에게 한판승을 확정하고 경기를 끝낸다.
결승에 오른 두 선수가 동시에 기술을 걸었지만 전영천 심판의 날카로운 눈은 상대 선수들이 인정할 정도로 정확한 판정을 내렸다. 모두가 깨끗하게 인정할 수밖에 없는 판정이었다.
런던올림픽 유도 심판은 전 세계 199개 국가에서 24명만 자격이 주어진다. 이 중 아시아는 6명으로 한국에서는 전영천 감독이 유일하다. 런던올림픽 유도 심판으로 나서는 전 감독은 선수시절 이루지 못한 꿈을 이루게 됐다. 또 제자인 김성민도 런던올림픽에 나서게 돼 전 감독의 기쁨은 두 배다.
전 감독의 올림픽 심판 자격은 여러 가지에서 큰 의미가 있다. 국내에는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있고 훌륭한 심판들이 있지만 전 감독은 지역한계를 뛰어 넘어 선정돼, 전북 스포츠의 쾌거라 할 수 있다.
전 세계 심판들은 올림픽 심판에 나서는 것을 영예로 가질 정도로 전 감독의 런던올림픽 심판은 한국 유도와 전북 유도의 금자탑을 세웠다는 평가다.
전 감독은 세계유도연맹 심판위원회서도 인정한 심판이어서 런던올림픽에서 결승전 심판으로 나설 가능성이 매우 크다.

△최고의 심판이 되기까지 한눈팔지 않았다=전 감독은 1988년 국내1급 심판이 된 후 24년 동안 한눈팔지 않고 세계에서 열리는 50여개 대회를 모두 심판으로 나선 끝에 런던올림픽 심판이라는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전 감독은 지금까지 월드컵, 그랑프리, 그랜드슬램, 마스터스, 세계선수권대회, 세계청소년선수권대회 등에서 심판으로 나서 가장 오심 없이 정확하게 판정을 내린 것으로 인정받았다.
특히 그는 국내 심판들이 꺼리는 왕기춘과 이원희의 라이벌 전 심판을 보면서 명성을 날렸다.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그는 태국 방콕 세계청소년대회 결승전 심판을 봤다. 49명 중 가장 심판을 잘 봤다며 최우수 심판으로 선정되면서 세계유도연맹 심판위원들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그러면서 마스터스, 세계선수권대회 결승 심판으로 나서 런던올림픽에 나서는 자격을 갖췄고 세계유도연맹 심판위원들로부터 올림픽 결승 심판도 볼 수 있는 최고의 심판 자격을 얻었다.
문원배 대한유도회 심판위원장은 “전 감독은 모든 면에서 전 세계 심판 가운데 단연 앞선다. 오심이 없는 심판으로 정평이 나있어, 공명정대한 판정이 필요한 올림픽에서 결승전에 나설 것이다”라며 “올림픽 심판은 선수가 따내는 금메달 이상의 가치가 있는 것이다”고 말했다.

△지도자로 두각을 나타내다=그는 2009년 고창군청 유도 팀이 창단되자 감독으로 자리를 옮겼다. 고창군청은 지난해 전국체전에서 금1, 은2, 동2개로 실업 팀 중 1위를 했고, 유도에서 종합2위라는 전무후무한 성적을 냈다.
전 감독은 “우리 팀 선수를 영입할 때 가장 먼저 본 것은 선수의 성실함이었고 다음으로 기량이었다”며 “이렇다보니 나이가 조금 많지만 이들을 잘 조련하면 많은 경기 경험이 있어 좋은 성적으로 이어질 것으로 확신했다”고 말했다.
우석고 감독 때는 김성민이라는 제자를 키워냈다. 전 감독은 초등학교 때 유도를 하다 그만 둔 김성민을 다시 불러 기본부터 유도를 가르쳤고, 1년 만에 전국체전에서 당시 최고의 선수였던 김수환을 누르고 금메달을 따내게 했다.
김성민은 김수환과 지금도 라이벌이 됐고, 지난 아시안게임에는 김수환에 져 출전하지 못했지만 이번 런던올림픽에는 세계 랭킹3위 자격으로 태극마크를 달고 출전한다.
무명의 김성민을 한국 최고의 선수로 키웠고, 창단 2년 만에 고창군청 팀이 국내 최고로 만들어 그의 지도력을 인정받았다.

△유도가 있어 너무 행복하다=전 감독은 초등학교 시절 육상을 했다. 운동에 소질이 있다고 본 그의 아버지는 전북체육중학교에 입학시켰다. 그는 소년체전에 출전해 메달도 따냈다. 고교에 입학한 그는 양정모가 금메달을 따내는 것을 보고 유도로 종목을 바꿨다. 너무 늦게 유도를 시작했지만 그는 남들보다 두 배 훈련을 했다. 지금도 그때가 가장 행복했다고 말하고 있다.
전 감독은 “유도는 학문과 똑 같다. 배우면 배울수록 어려운 것이 유도다. 아직도 모르는 기술이 있다”라며 “그래서 유도는 초등학교 때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다. 엄청나게 많은 기술을 연마하고 경험을 쌓아야 하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그런 그에게 뜻하지 않은 시련이 다가왔다. 고교 3학년 태극마크가 눈에 들어왔을 때에 왼쪽 다리를 다쳐, 최고의 고비를 맞았다. 유도를 때려치우고 지역에 있는 모 대학에 진학하려다 용인대 일반학생으로 입학했다.
전 감독은 “유도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용인대에 입학했고 엄청난 훈련을 소화해 냈다”고 회상했다. 그런 그의 성실성을 본 용인대 감독이 장학금과 태극마크를 달 수 있게 해줬다.
그리고 우석고 유도 팀이 창단되면서 고향으로 내려와 유도선수와 일반학생을 가르치게 됐다. 체육교사로 유도 감독으로서 그는 예절을 강조했다. 당시에도 학교폭력이 있었지만 유도를 배운 학생들은 학교폭력과 관계가 없었다. 지금도 그의 유도철학은 성실과 예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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