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은 여러모로 뜻 깊은 달이다. 겨우내 잠자던 대지를 일깨우는 생명의 축복과도 같은 계절인 동시에, 한 해의 사업들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달이다. 무엇보다, 우리 한민족에게 3월은 3.1절로 기억되는 민족성 자각의 때이기도 하다. 3.1절은 두말할 것도 없이, 대한민국 역사의 한 획을 그은 사건이며, 일제의 국권침탈과 폭압 앞에 죽음도 불사하지 않는 자유의지를 선포한 날이기도 하다. 그 고결한 희생을 마음 깊이 애도하며, 애국의 다짐을 되새겼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잊고 있는 역사의 아픔들은 더욱 많고 깊다.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 중 이제 살아계신 분은 54명뿐이며, 아직도 일본은 사죄는커녕 인정조차 하려하지 않고 있다. 우리가 역사의 증인이 되어 잊지 않아야함은 우리의 의무이자 사명일 것이다.
또 한 가지, 우리가 잊고 있는 아픔이 있다. 러시아를 비롯한 독립국가연합에 살고 있는 한국인 교포,‘까레이스키인’들이다. 그들은 스스로를 ‘고려사람’이라고 부른다.
일제의 국권침탈로 터전을 잃은 농민들이 두만강을 건너 이주하였고, 항일 독립운동가 등 망명이민도 상당하였다. 특히, 러시아 사할린의 경우는 석탄 개발 등을 위해 일제에 강제징용당해 끌려간 한인들이 대다수다. 이들은 일본의 정치적 공작과 스탈린정권의 가혹한 소수민족 분리·차별정책에 휘말려, 1937년 중앙아시아 등지로 강제 이주되었다. 이들은 화물열차에 짐짝처럼 실려 중앙아시아의 황무지에 내팽개쳐졌는데, 당시 고려인 수는 17만 5천여 명으로, 이 가운데 1만 1천여 명이 도중에 숨졌다. 참으로 나라 잃은 백성의 설움과 비극을 몸소 겪은 사건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고려인들은 좌절하지 않았다. 강인한 생명력으로 황무지를 농지로 바꾸고 한인 집단 농장을 경영하는 등 최선을 다해 삶을 개척해왔다.
현재 이들의 후손들은 러시아에 19만 여명 등 총 53만 여명이 중앙아시아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으며, 고국을 잊지 않으며 고려인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매년 모여서 기념행사를 갖고, 조국과의 교류 확대를 위해 애쓰고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조국이 그들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은 너무나 적은 듯하다. 인종차별이 만연한 이국땅에서 까레이스키 1·2세대는 외롭고 쓸쓸하며, 3·4세대는 정체성과 경제 불안 등 여전히 그들은 나라 잃은 백성에 머물러 있다. 물론 모든 고려인들이 불운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 중엔 한민족 특유의 높은 교육열정과 성실성으로 사회적·경제적 기반을 잡고 높은 지위와 부를 가진 이들도 많다. 그러나 어떤 사회적 성취에도 만족할 수 없는 것은, 고국에 대한 본능적인 향수일 것이다.
매년, 러시아 상테페테르부르크에서는 한복을 입고 태극기를 흔들며 거리를 행진하는 ‘까레이스키인의 날’ 행사가 개최된다. 금년 6월 7일에도 이와 같은 행사가 열리는데, 현지에서는 한복을 구하기가 어려워 색이 바랬거나 구식 한복을 입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한다.
지난번 상테페테르부르크를 방문하였을 때, 이진현 총영사관은 이와 같은 이야기를 전하면서 헌 한복이라도 보내주기를 부탁하였다. 그들이 내민 손이 이토록 소박한 요청이라는 것이 더욱 가슴 아프다.
우리가 그들을 너무도 쉽게 잊고 있을 때, 그들은 매일같이 우리를 생각했을 것이다. 이것은 어쩌면 역사에 대한 우리의 무관심과 냉담함을 상징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제라도 까레이스키인들 대한 인식을 새로이 하고,‘한복 보내주기 운동’같은 작은 정성을 통해 우리가 한 민족이고 동포임을 보여줄 수 있기를 희망한다. 우리에겐 작은 정성이지만 그들에게는 크나큰 위로가 될 것이다.
꽃망울이 찬란하게 피어나는 아름다운 봄이다. 고향의 봄을 애타게 그리워했을 어느 촌부의 눈물을 한번쯤 기억하고, 많은 이들의 관심과 적극적인 참여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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