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말과 일제 강점기 우리나라 판소리계를 주름잡은 인물 중 이화중선이 있다. 그녀는 무명으로 긴 세월을 보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서울에 등장해 대중들을 열광시켰다. 시원스런 목소리에 거침없는 창법으로 장안을 여러 차례 들썩이게 했다. 명창 임방울과 함께 가장 많은 음반을 녹음한 소리꾼이었다.
  이화중선은 원래 부모가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사회최하층에서 성장했다. 그녀가 소리를 접하게 된 것은 부모의 일자리가 권번이었기 때문이었다. 권번은 기생조합이자 일종의 교육기관이었다. 기생의 문으로 들어선 사람들은 이 권번에서 시조나 음곡, 습자, 가무를 배우고 어느 정도 자격을 갖추면 요정으로 나갔다. 이화중선은 바로 이 권번에서 잡일을 하던 부모 덕에 소리꾼들로부터 간단한 소리를 배웠고 이것이 후일 그녀가 본격적으로 소리하는 기생 즉 가기로 명성을 날리는 계기가 됐던 것이다.
  권번은 일제 강점기 산물이다. 그전 기생은 주로 관기로 궁중에서 약방이나 상방 소속이었다. 평소엔 약 달이기나 바느질에 종사하다 연회가 있을 때 노래나 춤을 추던 계층이다. 하지만 일제에게 국권을 빼앗기자 이들 기생들은 한성권번이라는 단체를 만들고 집단 활동을 했다. 권번은 기생들의 교육에서부터 실제 일하는 것까지 통제하고 감독했다. 이후 권번은 전주, 남원을 비롯해 평양, 달성, 개성, 경주, 진주 등에 우후죽순격으로 퍼져나갔다.
  권번은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 극에 달할 무렵인 1940년 일제의 전면적인 강압정책이 시행되면서 문을 닫고 말았다.
  정읍 산외면에 권번문화예술원이 3일 개원한다. 21억원을 들여 숙박과 전통문화체엄 공간을 마련한 것이다. 안채와 사랑행랑채, 별채 등 총 3채의 한옥으로 이뤄진 이 시설에 대해 정읍시 관계자는 “우리 춤과 소리를 가르치던 교육의 산실인 권번의 예인문화를 되살릴 수 있도록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이는 일환”이라고 밝혔다.
  사실 권번은 사회 밑바닥 천민계급이던 기생들이 자신들의 고단한 삶을 꾸려나가기 위한 자구책이었다. 그렇지만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 자칫 끊길 뻔 했던 우리 전통공연예술의 맥을 잇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전통문화의 즐거움은 이들 권번에 속한 기생들의 공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천대받던 기생들이 이룩한 불굴의 예술혼에 새삼 고개가 숙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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