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384년(침류왕 1년) 인도의 승려인 마라난타가 진(晉)나라에서 오면서 이때부터 불교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백제사회에 불교가 본격적으로 수용되는 시기는 성왕(523-553년)에서 무왕(600-641년)에 이르는 약 100년간의 일이라고 한다. 백제의 불교문화는 중국, 고구려로부터 수용하고 신라, 일본으로 전수되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데, 백제 불교문화의 정점에 있었던 곳이 익산 미륵사였다. 미륵사는 백제 무왕(600-641)대에 창건되어 조선시대 17세기를 전후하여 화재로 폐사 될때까지 1,000여년의 역사와 문화를 간직한 곳이다.
 미륵사지는 높이 430m의 미륵산(당시 용화산)을 등지고, 미륵산에서 뻗어 내린 동?서쪽의 능선이 좌우를 겹겹이 감싸고 있으며 앞쪽인 남쪽은 넓은 들과 낮은 언덕이 펼쳐져 있다. 산을 배경으로 앞으로 넓은 들이 펼쳐진 곳에 사찰을 배치하는 배산임수의 전형적인 입지 방법이 한반도에서는 백제 미륵사에서 시작되었다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입지 방법은 그 후로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한국적 건축계획 방법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미륵사지는 1974-75년, 1980-1994년의 발굴조사에서 1탑 1금당식 가람 3개가 병렬로 동·서·중원으로 구획되어 있음을 확인하였다. 각 원에는 중문·탑·금당을 1동씩 두어 1탑 1금당식 가람을 동-서축 선상에 나란히 배치하고 강당은 중원 북쪽에 하나만 두고 있다. 동·서원에는 석탑을, 중원에는 목탑을 두어 3탑 3금당을 이루고, 승방은 동?서원 북쪽과 강당 북쪽에 3개소가 있다. 이러한 미륵사지가 오는 7월 4일 백제역사유적지구 8개 유적 중 하나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다.
 세계문화유산이란 인류 전체를 위해 보호되어야 할 현저한 보편적 가치가 있다고 인정되어 유네스코(UNESCO: 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된 유산을 말한다. 문화유산에는 역사적ㆍ과학적ㆍ예술적 관점에서 세계적 가치를 지니는 건축물ㆍ고고유적과 심미적ㆍ민족학적ㆍ인류학적 관점에서 세계적 가치를 지니는 유적지 등이 포함된다. 미륵사지가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미륵사지 경관과 위치의 진정성이다. 미륵사가 위치했던 지역은 발굴조사에서 백제 때 미륵사의 외곽 배수로가 현재 미륵사지 동·서쪽 경계와 일치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따라서 미륵사지와 주변의 자연경관들은 1400여년전 백제 미륵사가 창건 되었던 당시와 거의 변함없이 유지되어 온 것으로 보인다. 또한 미륵사지는 백제 무왕과 관련된 익산 왕궁리유적, 제석사지, 쌍릉, 오금산성, 마룡지 등의 유적이 근거리에 위치하고 있어 위치의 역사적 진정성을 더욱 확보하고 있다.
 둘째, 미륵사지의 진정성이다. 미륵사 창건에는 대립 관계에 있는 국가 사이에 남녀 간의 사랑과 결혼, 그리고 불교를 통해 백성들에게 희망을 제시하고 국력을 신장하려는 무왕의 정치적 의지가 담겨 있다. 6세기말 백제의 위기 상황을 극복하고자 백제와 신라가 우호적인 관계를 맺기 위해 추진된 서동과 선화공주의 결혼 이야기가 서동요와 서동설화로 전한다. 
 사리봉영기는 미륵사지 석탑 보수정비사업 중 2009년 석탑 1층 심주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구의 하나이다. 내용은 백제 왕후가 재물을 희사하여 가람을 창건하고 기해년(己亥年/639년)에 사리를 봉안하여 왕과 왕비의 안녕과 중생(백성)들의 깨달음도 기원하는 내용 등을 담고 있다. 미륵사의 창건 목적과 시주, 석탑의 건립연대 등을 정확히 밝힘으로써 미륵사지 유적의 진정성을 더욱 강화시켜 주었다. 『삼국유사』의 창건 연기설화 기록은 발굴된 유적의 현황과 일치하여 미륵사의 실체적 진실을 문헌으로 확인 보완하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미륵사 건축 공간의 특성은 미륵 삼존의 불교 사상적 공간인 용화산 아래의 미륵하생 세계를, 무왕이 전륜성왕을 자처하면서 대규모의 미륵사 가람으로 현실세계에 구현한 것이다. 미륵사 창건은 기울어져 가는 백제사회의 중흥을 위한 국민적 화합과 국력 신장의 기반을 다지는 데에도 크게 기여했을 것이다. 그리고 세계유일의 3탑3금당에 의한 3원 병렬식 가람배치는 아직까지는 동아시아에서 최초의 예이며 백제만의 독창적 건축 활동 이라 할 수 있다.
 미륵사지는 무왕이 7세기 당시 백제의 불교사상, 건축기술, 불교예술, 공예 등의 모든 역량을 발휘하여 건립한 사찰로 동아시아 최대의 사찰 터이다. 현재의 미륵사지는 문헌 기록과 발굴 등을 통해 백제 때 창건했던 본래의 장소이며 창건 당시 건립했던 건축물의 하부구조와 일부 건축물이 온전하게 보존되었음이 확인되었다.
 셋째, 미륵사지의 완전성이다. 미륵사 가람의 규모는 동서 폭(건물기단외벽 간)이 172.16m이고 남 회랑 남단에서 강당 기단 북변까지 148.2m이다. 미륵사 평면 계획은 한국의 역대 사찰 중에서 그 어느 것보다 완벽하게 기하학적 균제로 이루어져 있다. 이런 측면에서 미륵사지는 고대 동아시아에서 사찰건축의 완벽성을 보여주는 사례이며, 나아가 백제인 들의 탁월한 문화적 역량을 볼 수 있는 중요한 인류의 문화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넷째, 미륵사의 문화교류이다. 미륵사에는 목탑 형태를 충실하게 번안한 석탑이 건립되었는데 동아시아 최초이며 최대의 크기이다. 미륵사지 석탑의 건립 형태와 기술 등은 후대에 신라로 전해져 한국의 독자적인 석탑 중심의 탑 문화를 형성하는데 기여하였다. 미륵사와 같은 대규모 사찰의 창건은 신라 및 일본에도 영향을 주었다. 황룡사 9층 목탑은 선덕여왕 때 백제의 장인 아비지를 초청하여 신라 기술자 200여명과 함께 3년여에 걸쳐 공사를 진행하여 645년에 완성하였는데 미륵사 중원 목탑의 영향을 받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일본의 산전사(山田寺/야마다데라)는 1탑 1금당의 배치를 보이지만 강당이 금당과 탑을 둘러싼 회랑의 외곽에 배치되었고, 금당 앞에 석등이 있다는 점에서 미륵사의 중원과 흡사하다. 금당지 및 목탑지 기초부의 판축토나 금당지의 가구기단 등도 미륵사와의 관련성을 찾을 수 있어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
미륵사지의 경관 및 입지적 진정성, 미륵사지의 진정성, 미륵사지의 완전성, 미륵사의 문화교류는 익산 미륵사지가 백제 당시 차지했던 중요성을 말해준다.
  이렇게 중요하고 의미 있는 미륵사지이지만 미륵사지를 방문하는 상당수의 사람들은 터는 넓은데, 무너진 석탑과 당간지주 외에 남아 있는 건축물이 없어서 볼게 없다고들 한다. 1992년 새롭게 복원된 동원 석탑은 국보 제11호 석탑의 모양과 색깔이 다르고, 탑이 날카로워 보여 잘못 복원 되었다고도 지적한다. 그러면서 하루 빨리 미륵사지를 복원해서 백제 때 웅장했던 모습을 보고 싶다고 한다.
 미륵사지에서는 건축 외에도 출토된 유물에서 1400여년전 미륵사의 품격을 볼 수 있는 유물이 많다. 지붕의 용마루 끝에 올려지는 새꼬리 모양의 치미(망새), 청자처럼 푸른색의 납유리를 표면에 바른 써까래기와, 붉은색이 칠해진 연꽃무늬 수막새, 2009년 석탑에서 출토된 정교하고 화려한 여러 무늬가 새겨진 금동제사리외호와 금제사리내호, 무처님께 향 공향을 올리던 보물 제1753호 미륵사지 금동제향로 등이 대표적이다. 미륵사지 발굴과 고증을 통해 만들어진 전시관 중앙홀에 전시된 50분의 1 축척의 미륵사 모형을 기억해 절터 남쪽에 있는 서쪽연지에 이르러 연지에 비친 미륵사지와 미륵산을 바라보면 1400여년전의 미륵사가 그대로 보일 것이다.   우뚝 솟은 미륵산과 좌우 능선을 배경으로 실제 크기로 커진 각 건물의 지붕 용마루 양쪽 끝에 붉은색의 커다란 치미가 있고, 지붕의 암 수키와는 검은색 또는 회색을 올리고, 연화문수막새 전면에는 붉은색이 칠해져 있으면서, 수막새 아래의 서까래에 녹유서까래기와가 부착되었다면 건축물의 웅장함과 화려함이 어떠할지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중원에 높이 45m 내외의 목탑이 금색 찬란한 상륜과 함께 우뚝 솟아 있고, 동원과 서원의 석탑이 목탑보다는 낮게 조화를 이룬 모습을 상상해본다면 현재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하여 미륵사지에서 볼 것이, 느낄 것이 없다 할 수 있을까? 층층이 연못에 비친 미륵사의 각 건물들의 아름다움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이러한 미륵사지는 익산이 고도로써 진정성을 확보하는 유적으로 역할이 중대하다. 앞으로 미륵사지는 전라북도의 역사적 상징물로, 문화관광자원의 핵심 유적으로, 고도 익산의 상징으로 지키고 발전시켜야 할 대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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